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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Nov 1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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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으니 큼지막한 바위들이 나타났다. 길이 조금 더 좁아졌고, 바람이 좀 더 강해졌다. 하늘을 가리던 나무들이 점점 사라졌다. 하늘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리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은 아까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새근새근 숨을 고르는 그녀를 보며, 그녀와 함께 당산에 오른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계단을 올랐다. 계단 주변에는 갈대가 무성했다. 정상을 수호하는 문지기처럼 그들은 위풍당당히 서 있었다. 바람이 우리를 향해 불었고,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갈대숲 너머로는 굴참나무와 떡갈나무가 바람의 운율에 맞춰 함께 진동하고 있었다.


“빨리,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나리가 나를 재촉했다.


정상에 도착했다. 우리 교실 크기의 평지가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큼지막한 한자가 적힌 비석이 공간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한자를 읽어보려 잠시 노력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탁 트인 하늘과 조각구름, 그리고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이리 와.”


나리가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그녀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나리는 나를 정상의 끄트머리로 끌고 갔다. 우리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 멀리 나와 나리의 집이 보였다. 초등학교와 분식집도 보였다. 마침 수업이 끝났는지 교정은 교실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사실 나리는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당산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유적이 발굴된 이후 내가 어떻게 산과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게 좀 보기 안타까웠다고 했다. 낯선 사람들이 오고, 땅을 헤집고, 여기저기 울타리를 친 건 맞지만 그래도 당산은 그대로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상에서 내려보는 광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당산은 거기에 그대로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산의 정상에서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리가 옳았다. 당산은 예전 그대로였다. 모습이 조금은 달라졌을 수 있지만,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은 그대로였다.


“똑같다.”


내가 나리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썹을 으쓱했다. 우리는 한동안 그곳에서 동네를 바라봤다. 땀이 마르는지 꽤나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약간의 닭살이 돋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를 마주 보았다. 우리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신기하게도 초등학교에서 그 아이와의 추억은 그게 전부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따로 만나거나, 무언가를 같이 하거나 하지 않았다. 나리도 특별히 나에게 말을 더 걸거나 그러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냥 데면데면한 짝꿍으로 우리는 지냈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기는 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학교에서 다투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고 방학이 찾아왔다. ‘가을에 봐!’ 마지막 인사와 함께 우리는 두 달간의 꿀 같은 휴식을 가졌다. 가끔 나리가 생각나곤 했다. 하지만 굳이 그녀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잊고 지내던 친구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 녀석 요샌 뭐 하고 지내지?’ 흘러가듯 말하는 것.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자리를 바꾸게 되겠지.’


개학 첫날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앞서 기술한 바와는 달리,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리를 다시 보게 된다는 것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젠 짝꿍이 아니라는 점에 조금 울적해지는, 정이 많이 든 단짝 친구와 이별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이 감정을 진지하게 탐구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텅 빈 의자가 보였다. 나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친구들이 하나 둘 교실에 도착했다. 근처에 살아서 방학 때 뻔질나게 만났던 놈들도 있었고, 조금 멀리 살아서 보지 못했던 녀석들도 있었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어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 울렸다. 모두들 자리로 돌아갔다. 나 또한 자리에 앉았다. 나리는 그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얼마 있지 않아 담임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셨고, 우리는 큰 소리로 다 같이 인사를 했다. 큼지막한 글씨로 적힌 ‘가을’이라는 글자와 함께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새 학기의 주의사항을 칠판에 적어 내려 가기 시작하셨다. 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당선 순서 정하기, 청소 담당 정하기, 화분 담당 정하기, 자리 바꾸기….


“아참.”


선생님께서는 판서를 하시다 말고 무언가 생각이 나셨는지 몸을 돌리셨다.


”나리가 전학을 갔어. “


웅성거리는 소리가 교실을 가득 뒤덮었다.


“그래, 그래. 나도 알아. 참 착한 아이였는데, 그렇지? 모두에게 좋은 친구였던 만큼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도 클 거야.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못하고 방학 중에 전학을 가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리도, 나리 부모님께서도 갑작스러운 일로 전학을 가게 된 거라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어. 그러니까 나리 집 연락처를 아는 친구들은 나리에게 개인적으로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하자. 연락처를 모르는 친구들도 마음속으로 나리가 새 학교에서도 여기에서처럼 즐겁게 생활할 수 있기를 바라주자꾸나. 알겠지? 자, 그럼 아쉬움은 뒤로하고 계속 당번을 정하도록 하자. 다시 1번부터….”


참으로 갑작스러운 발표였다. 여성 학우 중 몇몇은 아쉬워하는 소리를 냈고, 몇몇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옆자리를 다시 쳐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미리 말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난 짝꿍이었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쉬는 시간에 나리와 친한 친구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리의 집에 일이 생겨 급히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했다.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라 자기들에게도 나리가 급하게 소식을 알렸다고 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인사 한마디 없이 전학을 가 버렸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자기들도 깊은 사정을 알지는 못한다는 대답뿐이었다.


“너는 별로 상관없지 않아? 넌 어차피 나리 별로 안 좋아했잖아.”


규리가 나를 보며 톡 쏘듯 말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속으론 규리의 날 선 말투에 나는 강하게 반박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는 그녀를 생각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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