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조금 더 걸으니 큼지막한 바위들이 나타났다. 길이 조금 더 좁아졌고, 바람이 좀 더 강해졌다. 하늘을 가리던 나무들이 점점 사라졌다. 하늘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을 보니 괜히 달리고 싶었다. 상상해 보자, 푸른 하늘 아래, 푸른 녹음 사이로, 푸르른 계절이 일으킨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기분을.
“우리 여기서부턴 달려서 가자.”
나는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분명 좋다고 할 거야. 달리기 후 정상에서 맛보는 산의 숨결은 끝내주게 아름다우니까.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나리는 내 제안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듯 보였다.
사람의 얼굴이 빨개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스트레스, 추운 날씨, 알코올 등등. 하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안면홍조의 가장 큰 원인은 대부분 심리적 문제다. 전문가의 말을 빌리자면, 심적 긴장의 대부분은 결국 남들과 자신의 판단이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스스로 감정 표현을 겁내게 될 때 일어난다고 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나리의 얼굴이 달아오른 건 나리와 내가 달리기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 깨달았다. 나리는 달리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어릴 때부터 내가 그렇게 핀잔을 줬으니…. 좋아하는 게 이상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숨이 가득 찬 상태로 정상을 밟는 그 기분을 나리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이건 달리기가 빠르건 느리건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였으니까.
“괜찮아. 내가 옆에서 같이 달릴 테니까.”
내 말에 나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재미있을 거야. 예전과는 다르게.’ 속으로 생각하며 뜀박질을 준비했다. 그 어떤 날보다 몸이 가벼웠다. 나는 고갤 들어 정상을 응시하다, 내 옆의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나리에게 고개를 끄덕했다. 우리는 함께 발을 굴렸다.
바람을 가르며 내달렸다. 엄청 열심히 뛰지는 않았다. 나리와 보조를 맞춰야 했으니까. 남자아이들과 달리기할 때처럼 흥분되고 짜릿하지는 않았지만, 나리와 함께 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기쁘게 했다. 등산로 옆으로 늘어진 나무들이 바람 소리와 함께 시야 뒤로 사라졌다.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심장 소리는 점점 커졌다.
저 멀리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달리기를 멈춰야 할 때였다.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나리의 발소리도 내 발소리와 엇박자를 내며 조금씩 잦아들었다. 숨을 돌리며 나리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은 아까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번 달리기는 예전과는 전혀 달랐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새근새근 숨을 고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지금을 말을 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 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나리가 달리기를 조금은 다르게 생각할 거라는 걸.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된 뒤, 우리는 함께 계단을 올랐다. 계단 주변에는 갈대가 무성했다. 정상을 수호하는 문지기들인가. 그 수가 매우 많아서, 이곳을 뚫으려면 꽤 많은 병력이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최근에 본 반지의 제왕이 생각났다. 헬름 협곡을 점령하기 위해서 사루만은 얼마나 많은 오크 병력이 필요했는가. ‘그 수가 족히 1만은 넘을 거요.’ 아라곤이 셰오덴에게 경고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1만 명. 도대체 적벽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 것일까….
“빨리,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나리가 나를 재촉했다. 나는 현실로 돌아와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갈대가 바람에 맞춰 소리를 냈다.
정상에 도착했다. 우리 교실 크기의 평지가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큼지막한 한자가 박힌 비석이 공간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한자를 읽어보려 잠시 노력했으나, 포기하기로 했다. 산 말고 나머지 두 개는 도저히 무슨 뜻인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탁 트인 하늘과 조각구름, 그리고 저 멀리 동네가 보였다. 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갈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와.”
나리가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그녀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나리는 나를 정상의 끄트머리로 끌고 갔다. 우리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 멀리 나와 나리의 집이 보였다. OO 슈퍼와 초등학교도 보였다. 마침 수업이 끝났는지 운동장은 교실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사실 나리는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당산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유적이 발굴된 이후 내가 어떻게 산과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게 좀 보기 안타까웠다고 했다. 낯선 사람들이 오고, 땅을 헤집고, 여기저기 울타리를 친 건 맞지만 그래도 당산은 그대로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상에서 내려보는 광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당산은 거기에 그대로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직 당산은 그대로거든.”
그 순간 나는 이해했다. 나리가 맞았다. 당산은 예전 그대로였다. 모습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은 그대로였다. 그동안 당산을 찾지 않은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똑같다.”
내가 나리에게 말했다. 나리는 맞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한동안 그곳에서 동네를 바라봤다. 땀이 마르는지 꽤 공기가 시원했다. 약간의 닭살이 돋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를 마주 보았다. 우리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아이와의 기억은 그게 전부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따로 더 만나거나, 무언가를 같이 하거나 하지 않았다. 나리도 특별히 나에게 말을 더 걸거나 그러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냥 데면데면한 짝꿍으로 우리는 지냈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기는 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학교에서 다투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고 방학이 찾아왔다. ‘가을에 봐!’ 마지막 인사와 함께 우리는 두 달간의 꿀 같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 가끔 나리가 생각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녀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건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잊고 지내던 친구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 녀석 요샌 뭐 하고 지내지?’ 흘러가듯 말하는 것.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계절이 바뀌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개학 첫날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아마 자리를 바꾸게 되겠지. 괜히 섭섭했다. 그새 조금은 정이 들었나 보네. 생각하며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나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반 친구들과 잡담했다. 근처에 살아서 방학 때 뻔질나게 만났던 놈들도 있었고, 조금 멀리 살아서 보지 못했던 녀석들도 있었다.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고, 종이 울렸다. 우리는 다들 자리로 돌아갔다. 나리는 그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담임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셨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다 같이 인사를 했다.
큼지막한 글씨로 적힌 가을이라는 글자와 함께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새 콜라는 새 페트병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새 학기의 주의사항을 칠판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셨다. 정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당선 순서 정하기, 청소 담당 정하기, 화분 담당 정하기, 자리 바꾸기….
“아참.”
선생님께서는 판서하시다 말고 무언가 생각이 나셨는지 몸을 돌리셨다.
”나리가 전학을 갔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교실을 가득 뒤덮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내셨다.
“그래, 그래. 나도 알아. 참 착한 아이였는데, 그렇지? 모두에게 좋은 친구였던 만큼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도 클 거야.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못 하고 방학 중에 전학을 가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나리도, 나리 부모님께서도 갑작스러운 일로 전학을 가게 된 거라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어. 그러니까 나리 집 연락처를 아는 친구들은 나리에게 개인적으로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하자. 연락처를 모르는 친구들도 마음속으로 나리가 새 학교에서도 여기에서처럼 즐겁게 생활할 수 있기를 바라주자꾸나. 알겠지? 자, 그럼 아쉬움은 뒤로하고 계속 당번을 정하도록 하자. 다시 1번부터….”
참으로 갑작스러운 발표였다. 여성 학우 중 몇몇은 아쉬워하는 소리를 냈고, 몇몇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옆자리를 다시 쳐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미리 말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난 짝꿍이었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쉬는 시간에 나리와 친한 친구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리의 집에 일이 생겨 급히 이사하게 되었다고 했다.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라 자기들에게도 나리가 급하게 소식을 알렸다고 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인사 한마디 없이 전학을 가 버렸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자기들도 깊은 사정을 알지는 못한다는 대답뿐이었다.
“너는 별로 상관없지 않아? 넌 어차피 나리 별로 안 좋아했잖아.”
규리가 나를 보며 톡 쏘듯 말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리에 관한 기억은 얼마 안 가서 흐릿해졌다. 무언가에 계속 머물러 있기에는 초등학교 2학년은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장난을 치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