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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Oct 3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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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떳다.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온 환한 빛줄기가 동공을 때렸다. 눈을 비비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자명종이 신나게 울리고 있었다. 스누즈 버튼을 눌렀다.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1분만 있다가 움직이자.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 봤다. 몸이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켰다. 몸과 정신이 이완되는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일어나 세면대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샤워는 어젯밤에 했으니까 패스. 머리를 말리면서 오늘은 무엇을 입을까 고민했다. 하의는 카키색 셔츠에, 상의는 검은색 슬랙스로. 그래, 그게 좋겠어…. 아니지. 반대로 가야지.


오늘 하루도 화이팅. 거울 속 나에게 응원을 건넸다. 어떤 심리학자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거울 속의 당신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세요. 혼자인거 같은 기분이 들 때나, 내가 가치 없다고 느껴질 때, 이 조그만 행위는 당신 스스로에게 필요한 힘을 불어넣어 줄겁니다. 거울 속의 나와 하이파이브를 해보세요. 스스로를 응원하며 자기비난을 할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약속합니다. 놀라운 변화가 당신의 인생에 찾아 올겁니다….


정말 그런가? 의문이 들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 봤다. 키큰 나무의 머리사이로 거리가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부지런히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어. 중얼거리며 거울 앞에 섰다. 옷 매무새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반팔 셔츠는 오픈카라가 맞지. 옷깃을 정리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편하게 입는다면야 얼마든지 일반카라 셔츠를 입을 수 있어. 하지만 구두를 신어야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나는 절대 일반카라 반팔 셔츠는 입지 않는다. 그건 옷에 대한 예의가 아냐.


며칠 동안 비가 퍼붓듯이 내리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듯 햇살이 쨍쨍했다. 밖을 나서며 괜히 숨을 한번 들이 마셨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폐 속으로 잔뜩 들어왔다. 여름이었다. 매미 소리가 저기 멀리서 들려왔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빌딩들은 자신들의 색깔을 더욱 더 선명히 뿜어냈다. 가만 서 있으니 어느새 어깨죽지 부근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움직여볼까. 마음을 먹은 그 순간 건물 사이로 도시풍이 불었다. 바람은 나와 가로수를 살짝 흔들고는 머리위로 흩어졌다. 바람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푸른 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렀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살다 보니 벌써 여름이 왔다. 가을, 겨울, 봄, 그리고 다시 여름. 각각의 계절을 생각하면 난 항상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 꽃이 가득 핀 뒷산이라든가, 겨울 햇살 가득한 유원지, 아니면 낙엽이 덕지덕지 붙은 선술집의 창문, 그런 것들.


너무 정신없이 살았나보다. 자책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고개 들면 밀려오는 공허함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사실 이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며 호르몬이 다르게 작동하게 된 것일지도. 그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스로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안의 작은 아이 조차 내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거짓말도 백 번 하면 진실이 된다만, 그건 한가지 대전제가 이루어 져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 자신부터 먼저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 거짓된 자기암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납득시키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깊은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한숨 돌릴때면, 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 시절의 나에겐 하늘이 파란 것이, 나무가 푸른 것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갈색 흙으로 뒤덮힌 운동장이나, 그 위에 우뚝 솟아있는 노랑, 주황 파스텔 빛깔로 채색된 초등학교를 나는 왜 이토록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기억이란 참 오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우리 동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우리 동네의 이름을 좋아했던 나는, 내가 이 초등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동네 친구 누구는 그 초등학교를 다니고, 또 다른 누구는 저 초등학교를 다닌다고 말하는데 반해, 나는 이 초등학교를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위치도 상당히 괜찮았다. 학교의 뒤편에는 조그마한 산이 위치해 있었고, 오른편에는 하천이 흘렀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배산임수에 완벽히 들어맞았던 우리 학교는 그래서인지 입학생이 점점 늘어나더니, 어느 시점에 가서는 학생의 숫자가 수용가능 인원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확장 공사를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끼리 논의를 했을 테다. 사업성이 어떤지,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가 시작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학교를 넓히고, 체육관을 새로 짓고, 그렇게 규모를 키운 초등학교를 운영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들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공사현장에서 그만 유물이 발굴되고 말았다. 자주 벌어졌던 일이다. 내가 살던 곳은 고대 왕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건물을 올린다거나, 개발을 한다고 법석을 떨면 나중에는 그 자리에서 꼭 유물이 출토되곤 했다.


‘누구네가 건물을 올리는데 또 유물이 나왔다 아잉교.’


‘거 뭐 굿도하고 하드만 무당이 영 별로인갑제.’


동네가 워낙 작아서인지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 사실이 우리 동네에 큰 논란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워낙 같은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다보니, 많은 경우에 유물을 모른체 하고 그 자리 위에 그대로 건물을 올리곤 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그 사실조차 금세 소문이 퍼졌다는 점이지.


세상에 비밀이란 없다는 걸 그 때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하지만 초등학교 확장 공사는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규모가 컸다. 관련된 사람들도 많았고. 설왕설래 끝에 결국 학교는 이사를 가기로 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이사를 가면 학교의 이름을 바꿔야 했다는 점이다. 다른 동으로의 이사가 확정된 학교의 이름을 예전 동네의 이름을 따서 부를 수는 없다는 게 학교측의 설명이었다. 동창회에서는 거세게 반대했다. 전통이 어쩌고, 역사가 어쩌고.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사실 아무래도 좋았거든.


학교에 관한 배경지식 쌓기는 이쯤으로 할까. 이야기하자면 몇 시간은 더 떠들 수 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내용인데다가, 들을수록 머리만 아파지는 어른들의 사정이니까. 나는 내가 학교에서 만난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싶다.


나는 초등학교 이 학년이었다. 이 학년 칠 반 칠 번이 내 번호였고, 삼 분단 이 열의 왼편 책상이 내 자리였다. 우리 교실의 구성을 잠깐 설명하자면, 책상은 총 네 분단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들은 각각 교단을 기준으로 오른쪽부터 일 분단, 이 분단, 삼 분단, 사 분단으로 호명되었으며, 각 분단은 총 오 열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 짝꿍은 나리라는 여자아이었다. 그 아이와 나의 관계는 실로 역사가 깊었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서 자라서 어려서부터 자주 어울려 놀았다. 그 아이와 관련해서 내가 신기하게 여겼던 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놀이를 할 때면 그 아이와 내가 이상하리라고만 치 같은 편이 자주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 사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 아이들 축에서도 그렇게 날랜 편이 아니었던 그 아이와 한팀이 된다는 건, 놀이에서 질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아, 왜 계속 나리랑 같은 팀이 되냐고.’


그렇게 싫은 소리를 많이 했다. 당연히 우리 둘의 사이는 좋지 못했고, 나는 그렇게 그 아이를 달리기 못하는 여자애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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