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사이 Jun 30. 2024

외국인 노동자 허 상(さん)

대한민국은 정녕 안녕한가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2년 뒤, 일본으로 본사 파견을 나간 적이 있다. 한국 지사에서 5년 차 책임연구원으로서 왕성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자존심과 자신감이 드높았던 때, 일본 연구소의 한 부서로 발령받았다. 당시,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방사능 오염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으므로 가족은 한국에 두고 홀로 떠났다.


첫 출근날, 사무실 중앙에서 내선 전화기를 들었다. 내선 전화기는 연구원이 건물 안에서 어디에 있든 호출할 수 있도록 건물 전체 스피커와 연결되어 있었다. 수많은 책상과 그 위에 솟은 약 100여 명의 얼굴이 나를 바라봤다.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일본어 관용구 표현집에서 멋진 문장을 찾아 외웠던 덕분일까,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오오~스고이(대단하네)~’

난 멋대로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근무가 시작되었다. 난 2년 동안 배울 점이 있다면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회의에서는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메일은 꼼꼼히 읽으며 현지 표현방식뿐만 아니라 일본 연구원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을 유심히 관찰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밤 11시 넘어 퇴근하고 아침 8시까지 출근하는 삶을 반복하였다. 그들이 퇴근을 안 했다. 밤 11시에 퇴근해도 난 늘 인사를 하고 나와야 했다. ‘이 사람들은 가족도 없나?’

 

안전에는 매우 민감했다. 그곳엔 중국인, 대만인도 있었는데 처음엔 외국인만 지적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규칙에 서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지적을 받았을 뿐, 일본인 서로에게도 엄격했다. 주 1회 안전점검회의를 한다. 위험 상황을 상정해서 대비책을 세우고 안전구호를 만든 후 결연한 손동작과 함께 외친다. “요시!(좋아!)” 외국인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기 때문인지, 자전거 체인이 빠질 위험이 있다, 전방주시를 안 해서 도랑에 빠질 위험이 있다, 빗길에 미끄러진다, 타이어 공기 체크를 안 해서 전복된다, 짐을 많이 싣고 가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등 상상의 나래를 펼쳐낸다. 그래도 모두 진지하게 외친다.

“요시!”


연구 개발에는 깊이와 디테일이 있었다. 온갖 평가장비와 분석도구를 이용하여 모수를 늘려가며 정확성과 재현성을 확보한다. 덕분에 난 점점 말 못 하는 기계가 된다. 한국어를 못 알아들을 거란 생각에 은연중 소리 내어 푸념했다. “아니, 이것들은 바닷물을 다 퍼마셔야 바다가 짠 줄 아나”. 분명, 퇴근이 늦어지는 이유 중 하나였다.


1년이 지나가던 어느 날, 팀장이 다가왔다. “허 상, 자네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이번 연구보고회에 발표하는 게 어떻겠나. 허 상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배려심 많은 팀장이 모처럼 기회를 준다. “하… 하…이”.  나는 분명히 봤다. 옆에 앉은 녀석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을. 어차피 1년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자리였는데, 이럴 때만 관리자 대우를 한다. 평소에는 실험실에서 측정하고 샘플링하고, 드럼통 옮기고 pilot line 돌리느라 작업복이 흠뻑 젖을 정도로 일 시키면서, 아쉬울 때만 관리자란다. 물론, 일본도 이미 역삼각형 인구 구조 탓에 연차 높은 직원수가 많았으므로 관리직이어도 실무를 하는 비중이 적지는 않았다.


동료들이 파견 1주년이라고 선물을 건네줬다. 투박한 포장지에 싸인, 두께가 얇은 직육면체 상자였다. 뜻밖의 선물에 얼굴을 붉히며 감사인사를 했다. “허 상, 그거 좋은 거야” 그 자리에서 풀었다. 번쩍번쩍. 고급스러운 가위였다. ‘응? 가위? 왜?’ 일단 멋진 가위라고 답하자, “허 상, 샘플링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 배려인지, 조롱인지, 격려인지 2024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당시엔 상당히 뿔이 났었다.

‘이 녀석들, 더 열심히 가위질하라는 거야 뭐야?’

 

나는 그들에게 한낱 임시직 외국인 노동자였다. 직책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일에 능숙하지 않다면 신입과 다를 바 없다. 언어까지 서툴다면?

내게 외국인 노동자란 ‘현지어가 서툰 신입’이다.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년간 함께 파견 갔던 동료들은 아직도 회상한다. 주말엔 서로 만나 신나게 떠들지만, 회사에 가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일하다가 누군가 부르면 “하이~하이~”하고 달려가던 시절을.

덕분에, 적어도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를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한편, 당시 일본인 대부분은 한국에 관심이 없었지만-시골이라 아직 한류의 온기가 남았는지, 욘사마(배용준) 팬은 남아 있었다-, 뜬금없이 직접 물을 때가 있었다.

2014년 4월 18일 세월호 침몰. 나라고 뭘 알겠는가. 가라앉는 배를 바라보며 별일 없을 거라고 말했다.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는가. 전원 구조했다고.


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한국인으로서 어깨 펴고 당당히 설 수가 없었다.

당혹감을 거쳐 울분이 쌓여 슬픔의 둑이 무너졌다.

그동안 일본인에게 한국인은 너희가 아는 것과 다르다고, 성실하고 신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쓴 땀방울이 쓰라린 눈물에 뒤섞여 가슴으로 떨어졌다.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

가까스로 움켜쥐던 허 상의 자존심은 어느새 그림자 되어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2015년 한국에 돌아왔다.

참사는 끊이지 않았다.


2024년 6월 24일 화성 1차 전지 회사에서 화재 참사가 일어나고, 중국인 근로자가 대부분인 사실을 접한다.

그리고 이제 내게는 10대의 아이가 있다.

외국인도 국민도 불안하다.

대한민국은 정녕 안녕한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