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갈아입다
서른 이전까지 나에게 골프는 사장님 접대, 높은 분들의 비밀스러운 회동, 비싼 취미활동으로 보였다. TV를 보다가 스포츠채널에서 골프대회 모습이 나오면 ‘주먹보다 작은 공을 얇은 막대기로 잘도 치는구나’ 감탄하며 채널을 돌려버렸다. 물론 그 짧은 순간에도 스윙 후 공이 날아간 곳을 바라보는 모자 쓴 뒤통수, 두 주먹에 끝자락을 움켜잡힌 채 왼쪽 어깨에 걸려 등뒤로 넘어가 다시 공이 있던 위치를 노려보는 콩나물 막대기, 부자연스럽게 직각을 이루려 안간힘을 쓰는 두 다리는 사진처럼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골프’라는 이름표를 달고.
산골짜기 사이에 숨어 보이지 않던 골프장이 지금은 동네방네 자리 잡고 있다. 탁 트인 초록 잔디 위를 시원하게 날리는 것이 아니라, 벽에 걸린 장막에 영상을 띄우고 구멍을 뚫을 기세로 쏘아 올린다. 여유가 없어도 잠시 기분을 내고 싶은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필드에 비해 가격도 싸고 옹기종기 모여 술 한잔하고 평일 저녁 늦게나마 귀가할 수 있다. ‘휙~’ 헤드 중앙에 정확히 공이 맞았을 때의 쾌감은 도파민을 사정없이 뿜어낸다.
난 2013년 일본에서 골프를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함께 파견 나간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둘째, 골프를 배워두면 언젠가 사회생활에 필요하니까. 셋째,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2년 동안 말 그대로 미쳐 있었다. 시간 쪼개어 연습장에서 강사에게 배우고, 주말마다 동료들과 필드에 나갔으니 돈과 시간을 오롯이 골프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실력은 좋은가? 100타 안팎의 실력을 갖고 돌아왔다. 운동신경이 좋지 않으니, 어딜 가나 어울릴 수 있을 정도면 됐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복귀 2년 뒤, 내가 속한 부서의 팀장은 골프를 좋아했다. 팀에는 골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난 늘 함께였다. 스크린 골프장에서 밥 먹고 술 한잔하고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잘못된 자세 탓인지,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허리에는 늘 파스가 붙어 있었다. 일본에서 산 골프채는 스크래치 투성이에 손잡이 고무는 해진 지 오래였다. 기왕 시간 보낼 바에 나름 즐거움을 찾자 다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점수가 들쑥날쑥, 공이 잘 맞지 않을 때면 오히려 조바심 나고, 팀장 눈치에 마냥 웃고 있느라 스트레스만 늘고 말았다. ‘… 나이스 샤~앗’
코로나가 덮치고, 부서를 옮기며 골프는 멀어졌다. 금단 증상이 없다는 것은 골프를 즐기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골프백은 검은 비닐로 꼼꼼하게 싸서 애물단지처럼 구석 한편에 세워두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리지는 못했다. 뭉개진 검은 윤곽 위에는 먼지가 서서히 쌓였다.
“저 이제 골프 안 쳐요”
사람들이 하나둘 멀어졌다. 더욱이 술도 안 먹겠다고 하니, 셋넷까지 멀어졌다.
선배보다도 빠른 진급을 하며 회사에 인생을 걸고 있던 어느 날, 친한 선배의 느닷없는 퇴직과 지인의 죽음이 돌부리가 되어 발이 걸려 넘어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나 자신을 앞뒤로 훑으며 물었다.
‘너, 회사 임원이 되고 싶은 거니’
‘되면 좋지만, 글쎄. 지금 경쟁자도 많고 경기도 안 좋아서 쉽지 않겠는걸’
‘운이 좋아서 만약에 임원이 되면 좋을까’
‘모르겠다. 돈은 더 벌겠지만…’
‘지금 돌아봐. 임원이 된 자와 되려는 자들의 모습 말이야. 골프와 술, 비위 맞추기. 다 잘해야 할걸? 너 과로로 한 번 쓰러진 적도 있잖아. 괜찮겠어? ’
‘음…’
‘아부 떨지도 못하고 고지식하게 묵묵히 일만 열심히 하던 선배가 어떻게 물러나는지 봤지?’
‘…’
‘잘 생각해. 40대가 곧 꺾이는 나이야. 기껏해야 10년 다닐 수 있어. 시대가 변한 것 같지? 아니야. 기득권은 쉽게 내려놓지 않아. 너는 그들과 똑같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평행하게 늙어갈 거야. 늘 밑이지. 노예 말이야. 자발적 노예냐 아니냐로 옆길로 새진 말자고’
‘… 내가 뭘 해야 하지?’
결론은 명백했다. 유약한 몸뚱이는 술 마신 다음날 거의 빈사 상태였고, 체력과 운동신경도 뒤떨어져 스크린 골프 후반전(10홀부터)엔 자세는커녕 골프채를 잡을 악력도 부족했다. 아부? 그것도 능력이다. 고집 있고 자존심 센 사람은 표정과 안색으로 구역질한다. 따라서, 차라리 그 돈과 시간을 가족에게 쓰고, 내 미래를 위해 쓰는 것이 당연했다.
골프는 운동이 아닌가? 운동 맞다. 연습장에서 쉬지 않고 휘두르면 허리살이 빠질 법도 하다. 필드에서 엉뚱한 곳에 떨어진 공을 찾아 뛰어다니면 폐활량이나 다리 근력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효율로 따지면 여러 면에서 테니스나 마라톤, 수영이 낫다.
갑작스러운 골프 절교 선언에 주변에서 캐물었다.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도대체 왜?”
인생을 바로 잡겠다는 둥 시시콜콜 말하기는 멋쩍었다. 그래서 나름 명분을 만들어 장광설을 늘어놨다.
“골프에 정말 많은 돈과 시간을 썼는데 말이야. 생각해 보니까 글쎄, 골프만큼 이상한 스포츠가 없더라고. 축구, 야구, 테니스, 탁구, 당구, 심지어 컬링 등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종목은 점수를 쌓고 높아야 이기는데, 골프는 점수가 작을수록 이기는 경기란 말이야. 필드나 스크린 골프장에서 똑같이 돈을 내는데 한 번이라도 덜 휘두른 사람이 이긴다는 거지. 싱글 치면 깎아주나? 그런데도 모두가 한 타를 줄이기 위해 매일같이 연습장 가고 동영상 보고 골프채도 바꿔. 무엇을 위해서지? 갑자기 회의가 들어서 말이야. 납득이 안돼. 날 설득해 줄래?”
담배, 술, 도박처럼 건강이나 경제활동에 뚜렷한 폐해가 있는 경우라면 다를까?
예를 들어, 휴식시간마다 함께 흡연을 하며 수다를 떨던 친한 동료에게 금연을 선언했을 때,
“에이, 담배 피운다고 안 죽어. 스트레스가 더 해롭잖아. 의리없이 이러기야?”라고 한다면 의리와 우정을 다시 생각해 볼 기회다.
다행히, 골프 친구(골친)들은 나를 설득하지 못한 채 쿨하게 의리를 지켰다.
이제 출근 후에도, 점심시간에도 책을 보고 있는 나에게 더 이상 골친은 없다.
어느덧 책으로 새 친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인기 없는 취미인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