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지 마!
오늘도 주변에 선을 긋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두 팔 벌려 그린 원주만큼 선을 긋고 나를 가둔다.
감정의 경계. 사생활의 경계. 책임의 경계 등등
“선 넘지 마!”
옛 교실에서는 짝꿍과 휴전을 위해,
도로 위에서는 충돌하지 않기 위해,
국가 사이에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
육해공 가리지 않고 선을 긋는다.
“선 넘지 마!”
어제는 나와 너 사이에 선을 그었다.
지울 수 있고, 넘을 수 있는 선.
손 내밀면 맞잡을 수 있었다.
오늘은 나와 너 사이에 면이 서 있다.
손가락만으로 너는 선택되거나
화면 밖으로 밀려난다.
사각형에 갇힌 채, 주어 없는 ‘좋아요’로써
답할 필요 없는 안부를 묻는다.
너 01이 싫증 나면 너 02에게.
내일은 나와 너 사이에 공간이 채워질 테다.
허상 속에서 밝고 유쾌한 나는 늘 웃고 있다.
VR고글을 착용하고 있는 나는 표정이 없다.
점점 누가 나인지 알 수 없다.
이쯤 되면 일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자, 여러분! 스마트폰을 짓밟고, 고글을 집어던집시다!”
가상 세계의 너 92(ID: 네드 러드)가 목청껏 외친다.
너 00(ID: 유발 하라리)은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고 있다.
너 04(ID: 쇼펜 하우어)는 행방불명된 지 오래다.
너 44(ID: 오펜하이머)는 핵코드 개발에 해커를 모으고 있다.
너 90(ID: 볼테르)은 신을 만드는 중이다.
202x 년, 아직 사선을 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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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가상현실의 괴리를 극적으로 보기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이 좋다.
다만, ‘VR 속 오징어 게임’에 집중한 듯한 전개는 감안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