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사이 Jun 23. 2024

선(線)으로 본 기술 진보, 사선(死線)을 향해

선 넘지 마!

오늘도 주변에 선을 긋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두 팔 벌려 그린 원주만큼 선을 긋고 나를 가둔다.

감정의 경계. 사생활의 경계. 책임의 경계 등등

“선 넘지 마!”


옛 교실에서는 짝꿍과 휴전을 위해,

도로 위에서는 충돌하지 않기 위해,

국가 사이에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

육해공 가리지 않고 선을 긋는다.

“선 넘지 마!”


어제는 나와 너 사이에 선을 그었다.

지울 수 있고, 넘을 수 있는 선.

손 내밀면 맞잡을 수 있었다.


오늘은 나와 너 사이에 면이 서 있다.

손가락만으로 너는 선택되거나

화면 밖으로 밀려난다.

사각형에 갇힌 채, 주어 없는 ‘좋아요’로써

답할 필요 없는 안부를 묻는다.

너 01이 싫증 나면 너 02에게.


내일은 나와 너 사이에 공간이 채워질 테다.

허상 속에서 밝고 유쾌한 나는 늘 웃고 있다.

VR고글을 착용하고 있는 나는 표정이 없다.

점점 누가 나인지 알 수 없다.


이쯤 되면 일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자, 여러분! 스마트폰을 짓밟고, 고글을 집어던집시다!”

가상 세계의 너 92(ID: 네드 러드)가 목청껏 외친다.

너 00(ID: 유발 하라리)은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고 있다.

너 04(ID: 쇼펜 하우어)는 행방불명된 지 오래다.

너 44(ID: 오펜하이머)는 핵코드 개발에 해커를 모으고 있다.

너 90(ID: 볼테르)은 신을 만드는 중이다.


202x 년, 아직 사선을 넘지 않았다.

——————————————————-

현실과 가상현실의 괴리를 극적으로 보기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이 좋다.

다만, ‘VR 속 오징어 게임’에 집중한 듯한 전개는 감안하자.

이전 11화 알레르기라는 흔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