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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Jun 16. 2024

내 감각의 할루시네이션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출근 중, 늘 그렇듯.

정체된 도로, 버스가 한동안 멈춰 선다.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바라본다. 보도블록 옆 화단에 1m 남짓 높이의 사철나무 묘목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심은 지 얼마 안 된 듯, 서로 가까이 붙어 솟아오른 줄기는 앙상하다. 가지 끝자락에 돋은 잎들 사이로는 바람구멍이 가득하다. 무심히 성긴 초록을 눈에 담는다.

‘올여름 끝자락엔 무성한 울타리가 되어 있겠지?’


참새 한 마리가 어디선가 빠르게 날아와 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린다. 나무는 가느다란 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의 방문에 신난 듯 요란하게 흔들린다. 참새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옆나무로 옮겨간다. 또다시 세차게 흔들린다. 참새가 날아와 앉을 때 한 번, 날아가려 발돋움할 때 한 번. 마치, 참새 선생님과 사철나무 아이들 사이의 활기찬 아침 인사를 보는 듯하다. ”햇살 쨍쨍. 오늘도 무럭무럭 자라나요. 짹짹 “

그 모습이 귀여워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확대해서 참새를 찾아본다.

‘그 사이에 가버렸나 ‘

여기저기 살펴보지만, 찾는 참새는 없고 사진 왼편에 붉은 장미가 있다.

‘사철나무가 아니고, 장미 나무였나?’

한동안 사진 속 장미를 감상한다.

‘한 송이만 피었네’

정체가 길어진다. 창밖을 다시 본다.

장미가 있어야 할 곳에 장미가 없다.

다시 사진을 보고, 밖을 보길 수차례.  


‘어라?’

그것은 창문 안쪽에 비친 옆차선 차량의 후미등이었다. 하필 빨간 후미등이 나무의 초록잎 사이에서 절묘하게 반사되어 장미로 보였던 것이다.

스쳐 지났으면, 장미 나무로 생각하고 말았으리라. 다음날 이곳을 지나칠 때, 분명 못된 누군가가 장미를 꺾어갔다고 불평했을 테다.

 

퇴근 후, 늘 그렇듯.

나름의 등교 의식으로써, 시원한 물 한잔 들이켜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 한 강의당 수강시간이 70분이다. 재생 버튼을 누른다. 열심히 귀담아듣는다. 시계를 본다. 20분이 지났다. 다시 집중한다. 10분이 지났다. 스마트폰에 손이 간다. 화면을 열자, 30분이 지난다. 스마트폰을 침대 위에 던져버리고 모니터 화면을 본다. 오른쪽 아래 재생속도변경 메뉴가 보인다. 1.2배속으로 누른다.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1.4배속. 속도감이 느껴진다. 2.0배속, 몇몇 단어를 놓치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다. 35분 수업이 되었다.

다음날 다시 보니, ‘응?‘ 복습이 아니다. 다시 70분이 되었다.


오늘 장미를 보았고, 2배속 동영상 강의를 보았다.

그런데, 일련의 학습 과정에 뭔가 잘못 됐다고 느낀다. 본다, 기억한다, 안다.

‘어디가 잘못됐지?’


잘못 본다. 기억한다. 안다.

본다. 잘못 기억한다. 안다.

본다. 기억한다. 잘못 안다. (안다고 믿는다)

착시, 착오, 착각이 뒤섞여 선후관계를 알 수 없다.


‘감각의 오류’를 끌고 와 불가지론, 회의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객관적 정보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왜곡된 정보 사회에서 -심지어 챗GPT의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환각)이 반복 재생산할 경우마저 우려된다- 취약한 감각기관을 갖고 있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정보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뜨면 지나치지 말고,

정보를 무턱대고 삼키지 말고 음미할 것.

음미할 때 느끼는 맛은 교양과 상식에 달려 있다.

교양과 상식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 또는 의심’이 더욱 중요해지리라. 나의 존재를 부정할지 모르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의심(생각) 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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