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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Jul 09. 2024

바닷가 소년의 꿈

소설로 그린 인생(하)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바닷가에 접한 고향집은 30년이 지나도 박제된 듯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를 잡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잡아온 물고기로 작은 식당을 한다.


이른 아침, 나 홀로 해안가를 거닌다. 어젯밤 늦게 도착한 탓에 아내는 아직 자고 있다.

부드러운 파도소리가 귓불을 간지럽힌다. 길지 않은 모래사장은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황금빛 담장이 되어 가로막는다. 왼편 멀지 않은 곳에 암석들이 비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수평선 한 끝을 몰래 숨기고 있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불그스름한 온기가 바다를 가로질러 모래사장 위로 내 몸을 훑고 지난다. 등 뒤로 좁은 도로를 건너고 듬성듬성 박힌 집들의 지붕을 밝히고는 저 멀리 녹음 짙은 산으로 따스하게 번져갈 터였다.

나는 아직은 서늘한 모래사장 위를 맨발로 걷는다.

발바닥으로 올라오는 냉기가 따스한 햇살에 닿은 이마와 만나 상념이 되어 과거로 스며든다.


아버지는 고기잡이가 시원치 않은 날이면 술을 마셨다. 얼큰하게 취해 바다를 탓하고 어머니를 내치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어머니는 나를 얼싸안고 바닷가로 도망치다시피 내달렸다. 어머니가 몰래 흘린 눈물은 모래사장을 적시고 바다로 흘러갔다. 어린 소년은 덩달아 울었다.

소년은 애꿎은 모래를 조그만 발바닥으로 짓이기다가 쪼그리고 앉아 못생긴 슬픔을 써 내려간다.

‘정말 바다 너 때문이야? 말해봐! 이 바보야!’


바다는 모래 위를 쓰다듬어 슬픔을 지운다.

아무 말 없이.


떠난 이유는 단지 가난이 싫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도시를 동경하며 다른 삶을 꿈꾸었다. 아무렴 이보다는 나으리라.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유명인이 되고 싶다는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바다 앞에 헐벗은 가난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 다시 만난 바다는 나를 향해 잔잔한 파도 소리와 함께 뽀얀 손을 내민다.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다며 악수를 청하듯.

바다는 환하게 빛나고 있다.


“꽈아오”

상념에서 깨어나 소리 난 곳을 바라본다.

괭이갈매기 한 마리가 조수웅덩이에서 튀어 오른 작은 물고기를 잽싸게 낚아채, 힘차게 솟아오른다.

‘저 녀석은 운이 좋구나’


바닷바람에 내 몸을 맡긴다.

낯선 도시에서 내가 살아온 방식처럼, 늘 그렇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둥둥 떠간다.

누구는 애초에 거스를 수 없는 길을 허우적대며 발길질을 한다. 발버둥 칠수록 가라앉는다. 난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 가만히 힘을 빼고 몸을 띄운다. 수영을 아무리 잘해도 드넓은 바다에서는 고작 딱 한 뼘이다.

가난은, 아버지는, 나는 바다 위를 표류하는 각양각색의 유리병일뿐.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모르는 유리병.

물을 잔뜩 삼키고 깊게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유리병.


난 지금 어떻게 사는가. 그토록 원했던 다른 삶을 살고 있나.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현실과 희망의 괴리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현실이 희망에 수렴하면 권태가 있을 뿐. 현실과 희망의 최대 거리는 고작 한 뼘이다. 그 한 뼘 안 어딘가 행복이 있다. 행복은 배부르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이 멀리 있고 무료하지 않을 때 비로소 다가왔다.

다만 보이지 않았기에, 들리지 않았기에 옆에 두고도 애타게 찾았다.


한줄기 세찬 바닷바람이 상념을 떨치라는 듯 옷깃을 잡아 흔든다. 난 바닷가 모래사장을 달리기 시작한다. 푹푹 꺼지는 모래 위에서는 좀처럼 속도를 내기 어렵다. 있는 힘껏 내딛는다. 바다의 숨결로 상념의 티끌을 모조리 털어내리라.


순간, 발 밑이 깊게 패이며 앞으로 고꾸라진다.

“꽈아오”

젖은 모래 위에 엎어진 채, 고개만 든다.


하늘 높이 날았던 괭이갈매기는 다른 녀석이 덤비는 바람에 물고기를 놓치고 만다.

물고기는 하늘에서 반짝이며 떨어진다.


이 순간이 눈 속 깊숙이 담긴다.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가고,

괭이갈매기가 빈 부리로 울고,

내 살갗은 모래 섞인 바닷물에 젖는다.

모든 감각이 강렬하게 뒤섞인다. 단 한순간에.


“어쩌면 이미...”

바다는 나를 향해 재촉한다.


검지 손가락 끝으로 모래 위에 쓴다.

‘넌 알고 있었구나. 모두 한 뼘이란 것을’


파도가 쓸고 간 자리엔

작고 예쁜 조개껍데기 하나가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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