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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Jul 13. 2024

사적 제재에 대한 사적 소회

정의가 상품이 된 세상

사적 제재가 느닷없이 사회를 달구고 있다.

처음 접했을 때는 과거의 사건을 재조명하여 응당한 법적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나름의 정의구현을 목표로 한 듯, 새로운 사회 현상으로서 호기심을 일으켰다. 일견, 사건에 대한 사건이었다. 다만, 진실은 알 수 없기에 한동안 거리를 두고 지켜봤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섣불리 동조하기도, 의심을 드러내기도 어려웠다.


과거에 범죄가 있었다. 20여 년이 지나 제삼자가 당시 범죄를 들추어낸다. 당시 법적 처벌이 미진했다며, 세월의 무게를 얹어 소급 처벌을 촉구한다. 동시에 가해자의 현재를 조명한다.

‘여러분, 잔혹한 사건의 가해자가 돈으로 죗값을 치렀다며 떵떵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형사 처벌도 없었습니다. 소년 시절의 영웅담처럼 회자합니다. 여러분, 피해자는 어떨까요. 여러분이 피해자나 그 가족이라면 용납할 수 있습니까 ‘

군중의 양심이 자극을 받는다.


사건은 관심을 먹고 점점 커져간다.

이제, 자경단, 홍길동을 자처하며 악의 무리를 한 명씩 처단한다. 가해자가 돈과 권력으로 떳떳한 세상 속, 반대편에는 피해자가 무기력하게 서 있다. 피해자에게 ‘현재’는 늘 기약 없는 미래였다. 과거에 발목을 잡힌 채 시간의 흐름을 넋 놓고 바라볼 뿐, 몸과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


사건이 선악 구도로 뚜렷하게 자리 잡는다. 방관자들이 하나둘 참전한다. 마치 자신이 선의 추종자, 정의의 집행자가 된 듯, 악을 규탄하고 심지어 사회적 죽음을 부르짖기 시작한다. 그것은 애초에 신뢰를 잃은 공권력에 대한 군중들의 터져버린 응분이었다. 거의 바닥을 보인 법치 신용에 대한 반발력은 폭발적이었다.


시민들은 성난 얼굴로 광장에 모인다. 가해자를 하나씩 광장 중앙에 놓인 처형장 위에 세운다.

‘자, 모두들, 돌을 던지세요’

한동안 머뭇대지만, 선동자가 돌을 던진다. 돌 하나가 날아가자, 사람들은 덩달아 돌을 던진다. 공동책임은 무책임이다.

지나가던 이도 구경꾼이 되었다가, 누구를 향해, 어디를 향해 던지는지도 모른 채 돌을 집어든다.

귀스타브 르 봉이 말한 군중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개인의 이성과 양심은 군중 속에 희석되고 용해된다. 바닷물에 설탕 한 봉지를 넣다한들 달지 않다.


시간이 흘러, 결국 사회적 죽음이 선언되었다. 그러자, 다음 죄인을 세운다. 군중은 잠시 어리둥절하다. ‘저 사람은 누구지?’

홍길동은 확성기를 들고 외친다.

’공범입니다. 지금 아주 잘 살고 있죠 ‘

손에는 과거의 판결문을 들고 흔든다.

’어떤 악행을 벌였는지 눈을 뜨고 볼 수 없습니다. 수사기관도, 법원도 유죄입니다! 여러분!’


아직 끌려가지 않은 가해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지만, 들불처럼 번진 군중의 분노는 홍길동이 들이붓는 기름에 활활 타오른다.

사회의 관심을 모조리 끌어모은 덕분에 다른 사회 문제들은 은근슬쩍 묻힌다.

’돌을 던져라!‘


돌을 던지고 쓰러지면, 다음 가해자가 올라오길 반복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유명 유투버 사이의 사건이 터져 나왔다. 과거를 빌미로 돈을 요구하려는 이들 역시 유명 유투버였고, 홍길동 행세를 하던 자들이었다. 악을 폭로하던 자들. 사이버레커. 애초에 악했기에 악을 잘 알았던 것인지, 악만을 쫓다 보니 악인이 된 것인지, 유투버 시작의 목적은 정의구현이 아닌 돈이었고 단지 그 목적에 충실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서서히 드러나는 윤곽은 어리둥절하다. 홍길동이 가해자였다. 홍길동이 가해자라고 폭로한 다른 홍길동도 가해자였다.

과연 홍길동은 존재하긴 했는가.


정의와 공정, 고결한 가치가 더욱 절실해진 세상 속에 군중은 들끓고 있었다. 그동안 누군가 선동해 주기만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시작하는 순간, 지목당한 자의 끝은 파멸이다.

그런데 누가 선동을 하고 누가 지목을 하는가.

이제, 군중은 손에 돌을 쥔 채 덜덜 떨기 시작한다.

집단광기에서 벗어나니, 나도 찝찝한 죄인이 되어 있다.

이제, 군중들은 제삼자로서 꼭 돌을 던질 필요는 없지만 던지고 싶다면 최소한, 손가락질로 지목당한 자뿐만 아니라 지목한 자마저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사회는 불공정, 부조리하다. 국가는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 낮은 수위의 형사 처벌은 법 스스로를 우습게 만든다. 법 개정은 계속하고 있지만, 군중의 눈높이까지는 요원하다.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음주 운전자들에 대한 처벌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한편, 공적인 명예보다 수임료, 사적 이익을 더 중요한 가치로 다루는 듯한 법조계 행태 속에서 법에 대한 공정한 집행을 제고하고, 집행 근거로서의 형법도 재고할 필요성은 분명 인정할 수밖에 없다. 관례가 정의 위에 있고, 친목과 전관예우가 공정 위에 있으니 오죽하면 법조계에 AI도입이 시급하다고 하겠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이란 무엇인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며, 죗값의 최솟값은 피해자의 권리여야 할 테다.

처벌이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일리 없지만, 유토피아가 아닌 이상 강제력은 불가피하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회가 병들고 있다고 느낀다면, 분명 시스템에 이상이 발생했다는 방증이다.


어느새 우리는 정의마저 상품이 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내가 마시고 있는 커피 한 잔이 누구의 손에서 생산되어 어디서 가공되고 누가 수입하고 보관하는지, 성분은 안전한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시스템이 복잡할수록 소비자는 기만당하기 쉽다. 정의 한 잔, 내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관심 한 장을 지불한다. 무엇이 좋은지 모르니 남들이 좋다는 것을 따라 산다.   


‘왜 우리는 꼭 자기가 상상하는 대로, 자기가 상상하고 싶은 대로만 모든 걸 가정하는 겁니까?

실제 현실 속에는 가장 섬세한 소설가가 관찰을 하더라도 놓칠 수 있는 것들이 1000개는 족히 될 겁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 p475, 피고 드미트리(미챠)에 대한 페츄코비치 변호사의 변론 중-


따질 게 너무나 많은 세상.

정의마저 사고파는 피곤한 세상.


어쩌면,

자본주의의 종말을 알리는 서막일지도 모르겠다.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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