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대 철부지 손자의 눈물
꿈에서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부딪친다 - 프로이트 <꿈의 해석> 중
이른 아침, 촉촉한 베개의 냉기에 눈을 뜨고 말았다.
난 필사적으로 잠에서 깨어나길 거부했다.
‘안돼. 제발!’
꿈의 기억은 시작부터 본론이다.
개연성 따위는 없다.
좁은 버스 대합실 안에서 우람한 건달들이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 난 멀찌감치 떨어진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건만, 건달 두목과 눈이 마주친다. 나에게 다가온다.
난 군복을 입고 있다. 그는 이름표와 계급장을 본다.
‘허 상병? 어쭈, 군바리 상병 주제에 뭘 꼬나봐. 앙?’
건달은 내게 다가와 툭툭 치더니, 급기야 다짜고짜 주먹질을 한다.
주변에는 다른 군인도 적지 않았다.
민간인에게 이유 없이 얻어맞는데도 그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억울했다. 군인들에게 하소연했다.
모여달라고, 막아달라고.
얻어터지며 외쳐댔다.
‘도와줘’
머지않아 멀리서 한 무리의 군인들이 다가왔다.
‘네가 불렀냐’
군인들의 계급장이 보인다. 하사부터 대위, 중령까지 모두 상관이었다. 그들은 두들겨 맞아 엉망이 되고 일그러진 내 얼굴을 내려다본다.
중령이 말한다.
‘다 모였다. 어쩔까! 이 xx가. 감히 상관을 모이라 해?’
나와 중령을 중심으로 주변 무대가 부대 안 대대장실로 바뀐다. 욕지거리는 계속된다.
결국 나중에 징계받을 각오하라는 말을 듣고는, 분통을 삭이지 못한 채 의무실로 향한다.
벽이 온통 하얀 도색이 된 기다란 복도에 들어선다.
등받이 낮은 플라스틱 의자가 벽면을 따라 늘어서 있고 장병들이 빈틈없이 앉아 있다.
모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 아무 말이 없다.
한 명씩 바라본다.
그때, 장병들 사이에서 얼핏 낯익은 사람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간다.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더 가까이 다가선다.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
누군지 알아챈 순간,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나 그립던 분.
20년 전 돌아가시기 전날 꿈속에서 만났다.
창문을 통해 밝은 햇살이 비추던 아침, 내 방문을 열고 인자한 웃음 한 번 짓고는 돌아 나가셨다.
이후 한 번도 꿈에 나오지 않아서 투정하기도 하고
이미 좋은 곳에 가셨으리라 안심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속 깊이 그리움이 되어 커져만 갈 뿐,
단지 세월의 무게로 꾹꾹 눌러 놓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앉아 계셨다.
할머니가 젊고 건강하신 모습으로 꿈에 나오셨다.
날 보고 미소 짓는다.
난 그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말 한마디 못한 채 울기만 했다.
축축한 배게. 계속 흐르는 눈물. 흐느끼며 깨어났다.
‘아.. 안돼. 다시 돌아가야 돼. 할 말이 있다고’
애가 탈수록 돌아온 의식은 꿈에서 점점 멀어졌다.
일어나 앉아서 한동안 하염없이 운다.
눈이 붓는다.
출근해야 하는데, 멈추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했던 어린 20여 년은 철부지 말썽쟁이였고 그녀를 당연한 존재로 여기며 그녀의 당연한 관심과 사랑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다시 지내온 20여 년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며 그때 그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고 한없이 컸으며, 어떻게 내 삶의 무게중심이 되어 주었는지 알게 되었다. 조금씩.
그녀가 돌아가신 날 오전,
거짓말처럼 집 안 모든 시계가 멈췄다.
가족이었음에도 홀로 계실 때가 많았다. 가방을 내던지고 내빼는 손자 녀석.
‘할머니, 나 놀다가 늦게 와’
아쉬운 눈길을 알 길 없는 못난 손자 녀석.
그런 할머니를 위해 집이 대신 야속해했고, 집이 대신 애도했다.
이제 네 인생에서 할머니와의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었으니, 너 홀로 너만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듯.
어린 꼬마가 말했다.
‘할머니, 제가 설거지할게요’
‘아녀, 돼쓰야, 내 가거든 그때 혀’
‘그럼 난 평생 안 해도 되네!’
말라버린 입술에 눈물이 스며들지만,
슬픔에 일그러져 도무지 뗄 수가 없다.
말해야 하는데.
말해야 하는데.
전하지 못한 말은 입 속에서만 맴돈다.
‘저 이렇게 잘 컸어요’
마흔넷 철부지 손자의 시계는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꿈의 내용은 소망 충족이고 그 동기는 소망이다 - 프로이트 <꿈의 해석> 중
가끔 삶이 너무나도 무겁고 부질없게 느껴질 때,
마음 한 편에 커다랗고 새카만 구멍이 생겨난다.
그럴 때면, 마치 온몸으로 구멍을 메꾸려는 듯 이불속에 웅크리고는 가까스로 잠을 청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약한 군인’이 되는 꿈을 꾸었다.
이제 두 번 다시 꾸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