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보이지 않았다
MBTI는 남녀노소 성격을 간단하게 구분하기 좋은 가늠자가 된 지 오래다. 한마디로, 마이어스(M)와 브릭스(B)가 만든 성격 유형(Type) 가늠자(Indicator)로 엄마 브릭스가 딸 마이어스에게 가장 잘 맞는 배우자를 찾아주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는 낭설도 있지만, 이후 융의 연구를 접목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 여성들을 알맞게 배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2가지 상반되는 심리구분자들의 네 자릿수 조합으로서 총 16가지 유형이다. (이미 너무 유명하니, 더 쓰면 ‘지면 낭비’다)
복잡한 인간 성격을 16가지로 구분함으로써 자신의 막연했던 성격을 명확히 서술해 보고, 관심 있는 상대도 지레짐작하여 이해와 관용의 폭을 넓힐 수 있고, 나 자신 혹은 관계에서 부족한 점을 채워나갈 방법을 알 수 있다는 장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을 놓고 어떤 유형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16가지 유형에 사람들을 끼워 맞추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문사철을 파고들어 인간의 무늬를 알아가느니 인스턴트식 낙인을 찍는 방식이 확실히 현대적이긴 하다.
난 INFP다.
회사에서 내게 일을 배우기 시작하는 90년생 동료가 다짜고짜 물어왔다.
“허사이 님, MBTI가 어떤 유형이세요? 저는 ENTJ이거든요”
의도를 알 수 없다. 해석하면, ‘저는 당신을 자세히 알고 싶어요. 저부터 보여드릴게요’인데, 거의 반대 성향이라는 사실을 아는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간다.
‘난 INFP인데, 나와 상당히 다르구만. 넌 이제부터 나한테 맞춰!’라고 기선제압을 할까?
아니면, ‘난 조용한 외계인 INFP니까, 멍 때리고 있으면 그러려니 해’라고 나를 이해시킬까?
아니면, ‘난 잔다르크 INFP니까, 잔말 말고 따르되 앞으로 적의 화살은 활동적인 네가 맞는다’라고 방침을 세울까?
“응, 난 INFP야”
“와, 정말요? 일하시는 거 보면서 INTJ인 줄 알았어요.”
욕인지 실망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는 영문자 의사소통이다.
‘이 녀석, 조심해야겠는데’
난 ENTJ를 잘 안다.
집에 ENTJ가 계신다. 난 제압당한다. 우열을 가릴 이유는 없지만 연애할 때는 츤데레인 나를 졸졸 따라다니길래 어차피 결혼할 생각 있는데 나 좋다는 사람이랑 해야겠다 다짐한 순간, 청혼했고 일사천리 결혼했다. 그런데, 이제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내 기억이 왜곡되었나. 아내 말로는 졸졸 따라다닌 적도 없고, 내가 강력하게 결혼을 밀어붙여서 끌려가다시피 결혼했다고 한다. ADHD인 것이 드러났고 몽롱이(약 이름을 몰라 이렇게 부른다)도 먹고 있으니, 내 기억의 신용도는 바닥이다. 입을 다물고 뭔가 억울한 마음을 누르며 기억을 수정한다. 결혼 15년 차에 뭣이 중하랴.
난 궁지에 몰리면, 외친다. “물러서라. 영혼 없는 T! 내 여린 감정을 매도하지 말라!”
씨알도 안 먹힌다. “감정 같은 소리 하고 있어. 이게 말이 돼?”
그녀는 논리적이다. 말발에 밀린다. 화가 난다. 목소리가 커진다.
“어허!” 그녀의 한마디에 끝난다. 이제, 집에서 MBTI는 금기어다.
그런데, 회사에서 만나다니.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아닌가, ENTJ인 걸 알고 나서 이상하게 보이는 건가.
어차피 지피지기다.
난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을 알고 있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기.
그런데, 입 다물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내 정신이 안드로메다에 가 있다는 것이 문제다.
“너무 집중하며 일하셔서 말을 못 걸었어요.”
“어? 응.”
“저는 J라서 그런지, 스케줄 짜고 그에 맞춰 움직이는 게 편하고 일 밀리는 게 싫더라고요”
할 말은 잘하는 녀석이다. 오히려 꿍한 것보다 낫다.
여유롭게 주입식 교육하면 될 줄 알았는데, 까다로운 맞춤식 과외를 해야 할 판이다.
‘그래, 널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주마’
이 녀석을 알아가는 시간도 내 업무 중 하나가 된다.
서울에 출장 갈 때면, 일을 마치고 서울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을 즐긴다.
열차 시각표가 적힌 거대한 전광판 아래로 사람들이 쉼 없이 드나든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는 대형 TV 앞에 의자들이 늘어서 있고, 늘 만석이다.
난 외국인을 위한 안내 키오스크 옆에 멀뚱히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길 좋아한다.
큰 키에 벙거지모자를 쓰고 흰 민소매티와 헐렁한 반바지를 입고 성큼성큼 지나가는 젊은 남성, 짧은 머리에 긴 팔 와이셔츠를 정장 바지에 단정히 밀어 넣고 검은 서류가방을 들고 가는 청년, 검고 긴 생머리에 선글라스를 걸치고 검고 긴 원피스를 입었지만 굽 높은 샌들에 부자연스럽게 걷는 젊은 여성,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끌려가다시피 아이의 손을 붙잡고 등에는 묵직한 가방 메고 반대쪽 손에는 커다란 종이백을 들고 총총 걷는 엄마, 파스텔톤의 분홍색으로 염색하고 역시 파스텔톤 티와 치마를 구색 맞춘 소녀, 더운 날 정장에 넥타이까지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신사, 다른 피부색의 외국인, 한국인 같은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옷차림만큼이나 다양한 인상과 표정을 짓고 있다. 모두가 서로를 스쳐지나고, 서로 같거나 다른 방향으로 다른 속도로 내 앞을 지나간다.
어디를 향해 웃음 짓고 있는 걸까. 누구와 약속을 놓쳐 아쉬워하는 걸까. 열차를 기다리면서도 노트북을 펼친 채 전화할 정도로 바쁜 일이 뭘까, 저 비둘기는 오늘 배를 채웠을까? 사람들은 날지 않는 비둘기를 잘도 피해 걷는다.
나는 그들을 계속 바라본다.
궁금하지만 알 수 없다. 단지 겉모습을 볼 뿐이다.
‘본다고? 무엇을 본다는 거지? 본다는 것은 숨기는 것과 같아. 본다는 것은 뭔가 진실을 감춘다는 거야’
-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앞을 보지 못하는 ‘데아’가 웃는 남자 ‘그윈플렌’에게 한 말 중
오늘날 수천수만의 다양성을 16가지로 압축하려는 이유는 나와 너를 ‘보기’ 위한 욕망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보는 순간,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숨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