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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Sep 16. 2024

놀다와 쉬다

호모 루덴스의 놀면서 쉰다는 착각

열심히 집중하며 카프라를 하고 있던 아들이, 점심 식사 준비를 하는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나 좀 쉴게요’


학교를 마치면 학원 가기 전에 30분 정도는 늘 간식을 즐기며 만화책을 보는 아들.

그것은 ‘쉬는 것’이란다.

식사를 하며 엄마는 아들에게 묻는다.

엄마 : 아들에게 노는 것과 쉬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어?

아들 : 노는 건 친구들과 놀거나 게임하거나 TV 보는 거, 쉬는 거는 가만히 앉아서 책보거나  간식 먹는 거.

엄마 : 그럼, 친구들과 놀다 와서 쉰다면서 TV 보고 게임하는 건 뭐지?

아들 : 그건, … 응. 밖에서 뛰노는 거랑 집에서 혼자 노는 거랑 달라.

엄마 : 뭐가 달라?

아들 : 밖에서는 친구들하고 같이 공 차고 놀지만, 집에 오면 혼자 쉬는 거지. 응, 혼자 쉬면서…

엄마 : 헷갈리지? 노는 것과 쉬는 게 어떻게 다른 걸까?

아들 : 노는 건 재밌으니까 하는 건데, 쉬는 건 그냥 가만히 있는 건가?

아빠 : 엄마는 어떤데? 엄마는 쉰다고 하면서 누워서 동영상 보잖아.

엄마 : 난 그게 쉬는 건데. 그러면 즐겁고 편해져.

아빠 : 쉬다와 놀다의 구분을 목적어 없이 따지고 있어서 문제인 것 같은데?

아들 : 아빠는 책 보는 게 쉬는 거잖아. 근데, 그럼 쉴 ‘휴’잖아. 휴일은 뭐야?

아빠 : 그건 평상시 하는 일이나 학업을 쉬는 날 아닐까.

아들 : 그런데, 왜 쉬는 날 책 보고 글 써?

아빠 : 글 쓰는 건 일이야. 아니, 취미일까. 글 쓰면 재밌기도 하고 마음도 편해지긴 하는데. 책 보는 건 아들이 만화책 볼 때처럼 재밌어서 하는 거고.

아들 : 쉬는 날 왜 일해? 나랑 놀아줘.

엄마 : 넌 아빠랑 게임하자는 거잖아.

아빠 : 목적어가 필요해. 놀다와 쉬다는 play와 take a breath/rest/break 또는 relax의 차이와 가깝지 않나.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 : (아빠를 노려본다)


아들은 버퍼링 걸린 듯 잠시 고민하더니, 자기 방으로 간다.

국어사전을 가지고 온 아들이 ‘ㄴ’ 부분을 펼친다.

엄마 : 아들, 노는 건 어떤 단어를 찾아야 될까? 놀이?

아들 : 음, 놀다. (잠시 후) 놀다는 여럿이 모여서 즐겁게 지내는 거래. 쉬다는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거고.

엄마 : 그러면, 아들은 노는 것과 쉬는 것을 나눠볼 수 있겠어?

아빠 : 오~ 금방 찾네. 그런데 사전 정의가 조금 특이하네. 혼자서도 놀 수 있잖아. 아빠도 찾아볼게. (ChatGPT에게 묻는다)

엄마 : (아빠를 노려본다)

쉬는 것은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행해지는 반면, 노는 것은 ‘즐거움’과 ‘활동’을 중점으로 두고 있습니다. 쉬는 동안에는 에너지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고, 노는 동안에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죠. 쉬는 것에는 예를 들면, 잠을 자거나 누워 있는 것, 명상, 가만히 쉬는 것, 산책 등이 있고, 노는 것에는 스포츠, 게임, 친구들과의 놀이, 취미 활동 등인데, 놀면 즐거움을 느끼긴 하지만, 때로는 피로가 쌓일 수도 있습니다.

아빠 : 이게 더 명확하네. 멍 때리기, 자거나 명상, 산책이 쉬는 거고 그 이외에는 노는 것. 그러니까, 엄마의 누워서 동영상 보기는 노는 것! 쉰다고 착각하는 거지.

엄마 : (아빠를 노려본다)

아빠 : 아들, 쉴 때는 잠을 자요~ 알았죠?

엄마 : (낮게 위엄 있는 목소리로) 아빠. 따라 들어와.

아들 : …?


안방으로 끌려들어 간다.

엄마 : 내가 그걸 몰라서 계속 묻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아빠 : …

엄마 : 아이가 혼자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와주려는 거잖아. 어휴.

아빠 : …아.

엄마 : 암튼, AI중독이야. 아이는 아직 안돼. 스스로 생각하려고 대화를 터가는데 이걸 또.

아빠 : 아… 내가 또 판 깬 거야? 나 또 진지해진 거였어?

엄마 : 그래! 이번 대화는 끝났어. 아빠가 끝낸 거지.


다시 거실 식탁에 둘러앉는다. 아빠는 꾸지람에 피곤해졌다.  

아빠 : 아들~ 이제 우리 쉬자. 놀다와 쉬다의 차이 알았지? 놀면서 쉬는 건 없어. 그냥 우리 낮잠이나 자자~

엄마 : 아빠. 입 다물고 내버려 둬. 아들~ 가서 놀아요.


엄마의 깊은 뜻을 모른 아빠 때문에 이번주 가교톡 실패!


우리가 놀이와 진지함의 대립적 관계를 면밀히 살펴볼 때, 이들의 가치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놀이는 긍정적인 반면 진지함은 부정적이다. “진지함”의 의미는 “놀이”의 부정에 의해 정의되고 또 파악된다. 이렇게 볼 때 진지함은 “놀이하지 않음”일뿐이고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놀이는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다. 놀이 개념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더 높은 질서 속에 있다. 왜냐하면 진지함은 놀이를 배제하려고 하는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잘 포섭하기 때문이다.  - <호모 루덴스> 요한 하위징아, 연암서가 p106 -


쉰다고 자리에 앉거나 누워 스마트폰을 손에 드는 순간, 황홀경에 빠지며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시간만큼 피로가 풀렸을까. 재밌었다는 말은 할지언정, 적어도 개운해졌다는 사람은 없을 테다. 몸은 가만히 있었지만, 두뇌는 도파민을 찾아 미친 듯이 뛰어다녔을 뿐이다.

괴롭고 힘들면, 푹 쉬자.

자거나 명상하거나 산책으로.


<산책에 관한 엽편수필>

공장 주변에는 보도블록과 차도 사이에 가로수들이 늘어서 있다.

봄과 가을, 점심시간에 길을 거닐 때면 때아닌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들면, 마치 나를 반겨주는 듯 반짝반짝 손을 흔드는 나무 잎새들이 보인다.

바람에 일렁이는 사시나무 잎새들. 사시나무가 떨면서 내는 고운 파도소리 속에 황홀경에 빠진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나에게,

파르르 떨리는 사시나무 잎새들은 공포를 형용하는 관용어가 아니라 명징한 환희와 다름없다.

자연과 이어지는 이 순간이 바로,

알베르 카뮈가 그토록 갈구했던 심신의 합일, 그리고 인류의 침묵 속에 거행되는 무심한 영원과의 악수이리라.

진정한 휴식은 이것이 아닐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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