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럭이와 함께 하는 성장기
요즘 아이들이 조숙하여 사춘기 역시 빨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도 어디서 들었는지 반항기 넘칠 때면 사춘기를 들먹인다. 확실히 말대꾸도 많아지고 줏대도 강해졌다. 엄마아빠는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며 아들의 모습과 대조한다. 설마 벌써 사춘기라고?
엄마 : 아들~ 사춘기가 뭐야?
아들 : 목소리가 변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엄마 : 그건 변성기 아니야? 물론 변성기도 사춘기에 일어나는 몸의 변화 중 하나니까.
아들 : 말이 안 나오니까 답답해서 짜증이 많아져. 짜증이 많아지는 게 사춘기야.
엄마 : 아들은 아직 변성기도 아닌데. 사춘기라고 생각해?
아들 : 응. 아빠 잔소리에 자주 짜증 나. 아빠는 말도 못 알아듣고.
아빠 : 할 말은 없네. 그런데, 엄마 아빠한테 안기고 꼭 붙어서 어리광 부리는 거 보면 사춘기는 아닌데.
엄마 : 주위에 사춘기인 친구들 있어?
아들 : 응. 4학년 때 사춘기가 와서 벌써 끝난 친구도 있어.
엄마 : 응? 사춘기가 끝난 걸 어떻게 알아?
아들 : 걔, 엄청 잘 놀아. 난 사춘기야.
엄마 : 그래서 잘 못 놀아? 왜 잘 못 놀아?
아들 : 그냥 짜증 나.
아들에게 사춘기란 짜증이 많아지는 시기임에 틀림없다.
아빠 : 여자 친구 있는 남자애들도 있어?
엄마 : 사춘기랑 여자 친구랑 무슨 관계야? 사춘기는 이차 성징기니까 내 몸의 변화가 부끄러워서 소심해지는 거 아냐?
아빠 : 이차 성징 맞는데, 정신적으로도 이성에게 관심이 가지. 아들은 사춘기를 어떻게 보내고 싶어?
엄마 : 사춘기가 되면, 안방에서 쫓겨나는 거지. (아직 아들은 안방 침대 옆에서 자고 있다)
아들 : 사춘기가 되면, 하루에 한 시간씩 마음대로 게임하고 싶어.
아빠 : 그건 아니지. 이거 내쫓기겠는데?
엄마 : 아까 아들이 그랬어. 사춘기는 아빠 코 고는 소리가 짜증 나서 방을 나오는 거라고.
아빠 : 아~ 방을 당당하게 나와서 혼자 잘 수 있다? 용감해지는 건가?
엄마 : 그런데, 왜 사춘기가 되면 짜증이 많아져?
아들 : 몰라~ 누가 알려줬어. 선생님인가.. 아이 몰라~
엄마 : 뭐야? 너 지금 사춘기야? 짜증 냈어.
아들 : 짜~증~~
엄마 : 짜증 내는 게 사춘기가 아니야.
아들 : 사춘기가 되면 버럭이가 열 명이 돼. 슬픔이, 기쁨이 다 없애버리고.
엄마 : 왜?
아들 :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버럭이가 기억저장소로 다 날려버려. 그리고 버럭이가 열 명이 됐어.
엄마 : 그럼, 아빠는 버럭하니까 아직 사춘기야?
아들 : 응. 버럭이만 남아서, 건너오는 다리 폭파시켜 버려.
아빠 : 응? 다른 감정들이 못오게? 하하. 멋진데?
엄마 : 불안이가 많아지는 게 사춘기 아니었어?
아들 : 불안이는 완벽해. 미래를 자기가 예상하고 행동해.
엄마 : 그게 사춘기야. 어른이 되었을 때를 상상하며 지금 행동하는 것이.
아들에게 사춘기란 포악해지고 짜증이 많아지는 시기임에 틀림없다.
그런 아들이 밥을 흘리며 먹고 있다.
엄마 : 우리 아들, 아직 유아기네. 이유식 먹을 때처럼 흘리고.
아빠 : 애기 땐 이랬지. 숟가락으로 퍼서 우앙~ 하면서 휙 집어던지고~ 우앙~ 휙, 이유식도 날아가고 숟가락도 날아가고~
아들 : 으하하하.
엄마 : 아들은 그런 적 없어. 키워 봤어야 알지.
아빠 : 그랬을 것 같은데.
엄마 : 안 그랬어. 그냥 다 던졌어.
아빠 : 아~ 그냥 그릇째로 던졌구나~ 으아앙!~ 숟가락을 잡지도 않고 다 던져버렸구나 아주. 하하.
엄마 : 아들은 즐거워하면서 던지지 않았어. 버럭이가 있었지. 아들~ 다른 친구들은 사춘기 안 왔어?
아들 : 응.
아빠 : 사춘기가 온 지 애들이 어떻게 알아?
아들 : 알아. 병원 가면 알려줘.
아빠 : 응? 병원에서? 그것도 진찰이 되는 거야?
아들 : 몰라. 병원 가면 의사 선생님이 사춘기 왔다고 말한대.
아빠 : 응? 어떻게 병원에서 사춘기를 말해주지? 요즘 병원에서는 그런가 보네. 아빠는 아들이 사춘기 온 지 꽤 됐다고 생각하는데?
엄마 : 아냐. 아직 애기야 애기.
아빠 : 아냐. 아빠한테 반항한 지 꽤 됐거든.
엄마 : 아들, 여자 친구들은 사춘기 왔어?
아들 : …
아빠 : 모르지. 여자 애들한테 관심이 없으니.
아들 : 아니. 여자 애들은 사춘기가 오든 안 오든 오빠 욕만 해.
아빠 : 친오빠?
아들 : 아니, 친오빠든 자기 오빠든 다 욕해.
아빠 : ? 친오빠가 자기 오빠야. 아들한테는 쌀쌀맞지 않고?
아들 : 아닌데.
엄마 : 엄마는 알 것 같아. 고모 알지? 고모의 친오빠는 누구야?
아들 : 몰라. 아~ 으하하
아빠 : 고모는 남자 못지않게 활달했어. 내가 헤드락 걸고 프로레슬링을 했지. 옷장에 올라가서 점프하기도 하고~ ‘원, 투~ 쓰리!’ 동생이 울긴 했지.
엄마 : 어이구. 이러니, 욕 하겠어? 안 하겠어? 그런데 안 혼났니? 동생 그렇게 괴롭히면 안 혼나?
아빠 : 동생도 좋아했어.
엄마 : 뭐? 참나. 착각이야. 아가씨가 엄청 욕했잖아 지난번에.
아빠 : 왜?
엄마 : 기억도 안나는 구만. 그때 같이 모여서 술 마실 때 엄청 욕했잖아. 오빠가 그때 많이 괴롭혔다고. 울었다며, 그런데 좋아했다고? 아들~ 알 것 같아. 여자 애들이 왜 욕하는지. 그런데, 그것 때문에 사춘기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흔한 남매> 보면 에이미가 오빠한테 ‘저리 가라고~ 나한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아?
아빠 : 으뜸이는 사춘기 지났잖아. 에이미도 으뜸이도 둘 다 사춘기 아닌 것 같은데.
아들 : 으뜸이는 중3이야. 에이미는 5학년.
아빠 : 아빠는 에이미와 으뜸이가 빨리 철이 들었으면 좋겠어.
엄마 : 철들면 죽는 거라며.
아빠 : 아니, 내 말은 철 좀 들어서 <흔한 남매>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엄마 : 엄마는 아들이 사춘기 되면 슬플 것 같아. 지금은 저렇게 해맑게 웃고 있지만. 자기는 어때?
아빠 : 왜 슬퍼? 기뻐해야지. 성장했다는 건데.
엄마 : 더 이상 엄마 아빠의 손길이 필요 없어지는 거잖아. 스스로 일 인분의 몫을 해 나가는 거니까.
아빠 : 그건 아냐. 아들은 더 어리광 부릴 것 같아. 그런데, 평생 데리고 살 거 아니었어?
사춘기는 정말 어떨까. 버럭이가 지배할까. 불안이가 지배할까.
아직도 어리광 부리는 아들을 보며 사춘기를 생각하는 것은 이르지 않을까?
사춘기 때문에 불안해지는 것은 오히려 부모였다.
엄마 : 아들, 사춘기가 되면 왜 짜증이 많아진다고 생각해?
아들 : 그냥.
아빠 : 그럼, 아빠는 계속 사춘기야?
아들 : 응. 아빠 철 안 들었어.
아빠 : 그럼, 철 안 든 사람들, 포악하거나 성질 사나운 사람들은 다 사춘기야?
아들 : 응.
엄마 : 아~ 사춘기가 지나서 어른이 되면 화를 내지 않아야 돼?
아들 : (끄덕)
엄마 : 뭔가,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있는지 없는지로 나누는 것 같네. 사춘기가 지나서 어른이 되면 감정을 잘 통제하는 것.
아빠 : 아들~ 사전 찾아보자. 한자가 궁금하네. 네 번의 봄? 설마 4년을 의미하는 건가? 죽을 사? 으흐흐. 자기뿐만 아니라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인생 초기?
사춘기(思春期)
육체적・정신적으로 성인이 되어 가는 시기. 이차 성징이 나타나며, 생식 기능이 완성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이성에 관심을 가진다. 청년 초기로 보통 15세에서 20세를 이른다.(표준국어대사전)
엄마 : 몸은 어른이 되어 가는데 생각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시기. 마치 가훈을 정하는 것처럼 인생의 좌우명, 가치관을 정해야 할 것 같은 시기라고 배웠어.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 생각하니까 틀렸던 것 같아. 그 어린 시기에 인생을 고민하고 설계하고 한 문장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지금도 모르겠는데.
사춘기는 분명 청춘기, 삶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다. 몸도 마음도 어른이 되는 과정이겠다.
그러나, 아직 아들에게 사춘기는 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사춘기를 겪었음에도 사춘기를 알지 못한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노트에 빼곡히 참을 인(忍)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진리인 양.
‘참을 인이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을 좌우명 삼아, 인내하고 또 인내하리라고 다짐했던 시간들.
30년이 지난 지금, 불가지론에 가깝다. 진리가 뭔지 알 수 없다.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진리에 가까우리라.
사춘기를 열 번째 겪는 듯 사십춘기를 보내는 아빠로서는 어린 시절 겪은 사춘기를 돌이켜 보며,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누구보다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아이의 생각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리라 다짐한다.
문득, 머릿속에서 쓸데없는 그래프가 그려진다.
정신의 성장은 완만하게 누운 우상향 1차 함수(직선)인데 반해, 신체의 성장은 음의 2차 함수(컵 모양 곡선)이다. 정신의 성장 함수는 0이 아닌 일정한 값에서 시작하고(y절편은 0이 아니다), 신체의 성장곡선은 태어남과 동시에 원점에서 시작한다. 이 두 그래프가 처음 만나 신체 성장곡선이 정신의 그래프와 만나는 지점(제1접점)을 지나 커지는 일정 기간이 사춘기이리라. 그리고…
정점을 찍고 내려와 두 번째 접점을 만들 때, 철이 듦과 동시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