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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두부 Oct 23. 2021

도망치지만 마

08

<킹스 스피치>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6세에 대한 영화다. 그는 말을 더듬는다.   왕자로서 나선 연설에서 간단한 말 한마디조차 해내지 못한다. “저 저는 국왕 폐..폐...폐…..폐..(폐하께)”


나는 영화에 빠져들었다. 말 더듬이의 심리를 어찌나 잘 표현했는지 모른다. 사람들 앞에 서는 압박감, 겨우 입을 열었는데 첫음절에서 막혀버렸을 때의 절망감, 모멸감에서 비롯된 분노, 그 분노를 가장 소중한 사람 앞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슬픔.


국민 체조 같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하며 말 연습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가볍게 보이며 웃음이 나오는 부분이지만 난 웃을 수 없었다. 말 더듬이는 진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과장된 동작은 갇혀있던 말이 나오도록 돕는다. 실제로 높이뛰기 선수처럼 발을 땅에 내려 찍고 살짝 몸을 띄우는 동시에 말을 하면 어떻게 해도 안 나오던 소리가 나오곤 했다.


조지 6세에겐 버거운 도전이 끊임없이 주어졌다. 왕위를 포기한 형 때문에 얼떨결에 왕위를 받아야 했다. 간단한 대화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누구보다 연설을 잘해야 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의 한마디에 온 국민의 내일이 달려있었다. 상대는 세기의 선동가 히틀러였다.


압박감을 못 이긴 그는 연설 연습을 하다 아내를 앞에 두고 운다. “난 왕이 아니야, 난 왕이 아니야”라면서.




나도 늘 압박과 싸워야 했다. 대국민 연설은 아니지만 대학교 입학 면접이라던가 발표를 맡은 수업이라던가 발의자로 나서는 회사 미팅 같은 상황에서 그랬다. 남들은 어떤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지 고민하는데 나는 생각을 입으로 뗄 수 있을지부터 걱정했다.


망쳐버린 날도 많았다. 중학생 때는 봉사활동에 갔다가 수십 명 앞에서 말을 해야 했는데 한 마디가 안 나와 그냥 나와버린 적이 있다. 대학 입학 면접에서는 면접관이 ‘말로 하기 힘들면 글로 써보라'고 해서 면접장에서 펜을 들었다. 그런 날이면 집에 돌아와 화를 냈다. 속에서 끓어오른 분노가 표적을 찾다 찾다 가족에게 향했다.


압박은 몇 번이고 다시 찾아왔다. 나는 매번 다시 긴장했다. 무서워서 말하는 상황을 피했다.




조지 6세는 호주 출신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만난다. 로그는 조지 6세가 이제껏 만나온 치료사들과는 달랐다. 다들 왕자의 말 더듬 증상에만 집중했으나 로그는 그가 살아온 이야기에 집중한다. 안짱다리에 왼손잡이라는 이유로 강압적 교육을 받았던 유년시절이나 말 더듬이어서 그가 받았던 상처에 대해 터놓고 대화하길 원했다.


조지 6세는 왕족이었기에 그가 심기 불편해할 만한 말은 아무도 꺼내지 않았지만 로그는 능청스럽게, 무례할 정도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조지 6세는 그럴 때마다 발끈하지만 로그는 끄떡도 않는다. 치부를 덮어두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왕위에 오를지 말지 머뭇거리는 조지 6세에게 요구한다. 왕이 되라고. 피하지 말라고.


좌절했던 왕도 로그와 대화를 하고 나면 다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다시 마이크 앞에 설 수 있었다.




나도 자주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특히 이십 대 중반쯤이 되어 스스로 해내야 하는 일이 많아졌을 때부터 그랬다.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할 때나 나 자신이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실감이 들 때 짜증을 냈다. 지적을 받으면 화가 폭발하기도 했다. 그래선지 살면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말 더듬을 모른 척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로그 같았다. 말 더듬이 심해져 인터뷰를 나가기 싫다고 했을 때 “인터뷰어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라고 했던 회사 동료, “말 더듬이 회피를 정당화시켜주진 않는다"라고 말해준 친구. “징징거려도 되는데 도망치진 마"라던 교수님.


가혹하다 느꼈지만 기억에는 오래 남는 말이었다. 그런 조언이 쌓일수록 내게는 인내나 끈기 같은 것들이 몸에 뱄다. 인터뷰가 통과를 못하면 될 때까지 붙잡고 밤을 지새웠다.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끝내지 못하면 개인 시간을 써서라도 해냈다. ‘뭐 그렇게까지 해'라는 말도 들었지만 난 뭔가를 해내지 못할 때마다 말 더듬에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포기할 수 없었다. 힘들고 괴로울지언정 포기는 안 했다.


나는 뛰어난 인터뷰어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사람을 붙잡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편집해내는 멤버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아이디어가 좋지는 않지만 일을 어떻게든 해내는 직원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인정이 쌓여 자신이 생겼고 자신이 있기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도망치지만 않으면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았다.




<킹스 스피치>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은 조지 6세가 말을 더듬기 시작할 때 고개를 숙이는 청자들이다. 내게도 익숙한 광경이다. 로그는 그래서 눈에 튀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이 발끈하거나 순간의 좌절을 겪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단호하게 지적하는 게 극복을 돕는 길이라는 걸 알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왕을 대했다. 


영화의 마지막 조지 6세의 전시 연설이 나온다. 여전히 말 더듬이 남아있었지만 대영제국의 온 국민은 완벽하지 못한 연설에 감화된다. 국민들은 왕이 연설에 갖는 부담의 무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겐 아직 그런 날이 오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가까워져가고 있다고 느낀다. 내 신경질을 무릅쓰고 할 말을 해준 사람들 덕분에. 물론 내가 대국민 연설을 할 거라는 말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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