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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두부 Oct 23. 2021

어떤 영화에서도 음악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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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째 길거리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학 졸업반 때 팀에 합류해서 직장을 다니는 지금까지. 바빠질수록 쉽지 않다. 쉬는 시간을 꽤 많이 반납해야 하니까. 그럼에도 계속하고 있다. 가끔 미루긴 해도 빼진 않는다.


가끔 길거리 인터뷰가 내 본업이라 오해하는 지인들도 있다. 뉴미디어 스타트업 정도로 생각하는 거다. 물론 꽤 큰 채널이다. 구독자는 20만 명 정도다. 지금까지 1,600개의 인터뷰를 담았다. 하지만 이 활동으로 수익을 내진 않는다. 광고를 해 본 적도 없고 광고를 유치한 적도 없다. 이걸로는 절대로 돈을 안 벌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게 주된 목적은 아니다.


그러면 묻는다. '뭐야, 그럼 왜 하는 거야?'라고까지 하진 않지만 "아... 그렇구나. 근데 그럼 그거 목적이 뭐야? 뭐길래 주말까지 반납해가면서 해?"라며.


맞다. 일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왜 하는지 정립되지 않은 일은 길어질수록 방향이나 힘을 잃는다. 지인들은 알겠지만 나는 이 활동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급한 성격까지 더해져 그런 질문에는 발끈해서 우아하고 멋들어지게 대답하고 싶다.


그런데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나 이거 왜 하고 있지? 느낌적으로는 안다. 인생 최고 콤플렉스의 극복을 도와줬다. 이 인터뷰 활동 덕에 에디터로 커리어를 시작하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고 이야기를 쓰면 수만 명의 독자들이 감동받는다. 주변에서 '뭔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딘가 멋있어 보이는 일'로 봐주는 시선도 솔직히 좋다.


하지만 모든 게 혼자 감동받고 혼자 좋다고 해서는 부족하다. 혼자 좋고 남은 공감 못 하는 건 사실 아닌 거다. "좋은 뜻으로 하는 건 알겠는데, 공익을 위한 거라거나 뭐 그런 목적이 있어야 할 거 아냐."라는 말을 듣고 오, 공익을 위한 거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또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그래서 어떻게?라고 묻게 된다. 조금 혼란.


결국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렇다고 이 일에 대한 확신이 조금이라도 무너졌느냐. 아니었다.


얼마 전 우리 팀 동료가 쓴 인터뷰가 발행됐다. 이야기가 정말 좋았다. 짧은 글이었지만 독자를 감화할 수 있는 콘텐츠였다. 반응도 좋았다. 제작자에게 독자들 반응이 뜨거운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몇 번이고 읽었다. 읽어도 읽어도 너무 좋아서. 사랑 이야기였는데, 보는 것만으로 애틋하고 설레는 로맨스였다.


“올해 초에 어떤 남자랑 나란히 길을 걷는 꿈을 꿨어요. 취업준비로 힘들 때였는데, 저한테 괜찮냐고 묻는 거예요. 그 말에 괜찮다고 답했을 뿐인데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어요. 꿈에서 깨고 생각해보니 3년 전에 인턴 프로그램에서 같이 일했던 남자였죠. 궁금해져서 SNS에다가 이름을 쳐봤는데, 찾아지더라고요. 작은 문화예술 공간을 운영하고 있었죠. 다짜고짜 메시지를 보냈어요. ‘저 기억하시나요. 오늘 꿈에 그쪽이 나와서 연락드려요.’라고요. 자기 공간에 놀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갔죠. ‘진짜 찾아올 줄 몰랐다'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들었는데, 제가 나타났을 때 기분이 되게 이상했대요. 발바닥이 찌릿찌릿하다고 했었나. 저도 그랬어요. 같이 밥을 먹게 됐는데, 새우 머리를 남기길래 ‘머리 제가 먹어도 돼요?’ 이랬거든요. 그러곤 남자가 웃는 모습을 보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묘했어요. 그렇게 만나게 됐어요”
“엄청난 우연이네요.”
“신기하죠. 저도 그래요. 처음 알았을 때는 친하지도 않았고, 이후로는 연락도 한 번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그 사람과 계속 연결돼있었다는 기분이 들어요. 3년 전 인턴 프로그램을 같이 할 때 그분이 제 마니또였어요. 선물로 ‘언니네이발관'의 CD를 받았었죠. 그리고 그 음악이 제게 남아 위로가 되어줬거든요. 그 순간부터 쭉.”


만원 지하철에서 치이면서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열차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내려 걸었다. 아주 예쁜 영화를 본 적 있나.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 세상이 너무 예뻐 보이지 않나.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픽션이 아니라 무려 현실이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맨날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배우가 아니라 길거리 평범한 사람들. 작가의 작품이 아닌 그대로의 이야기. '감동 실화'보다 백 배는 극적인 무엇. 이 글을 읽은 수만 명도 그런 기분이지 않겠나 싶었다.


열성 독자라면 나처럼 길거리의 사람들이 다들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현실에 치이고 자주 꺾이는 나지만 가끔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이, 차가워 보이는 사람도 아름다움을 품고 있을 거라는 실감이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모른다.


어느 날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서 5년간 우리 팀이 쌓아온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다 읽은 날이 있었다. 몇 시간이고 멈추지 않았던 전율을 기억한다. 끊임없이 차올랐던 감정들을 기억한다. 어떤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노래에서도 나는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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