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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Dec 27. 2021

12월 27일 월요일

2021년 마지막 월요일기. 짧은 연말정산.

1. 1월

파주까지 길게 이어지는 길에서 이른 노을을 보며 춥지만 즐거운 드라이브를 즐겼다. 최백호 바다 끝을 일주일에  번씩 들어가며. 코로나가 끝날  알았는데 올해는. 생일엔 큰맘 먹고 백화점에 들어가 작은 다이아가 박힌 목걸이를 샀다. 운이 좋았고 기분도 좋았다.


2. 2월

남편의 재택과 나의 휴직이 맞물린 환상의 한 달. 게다가 몇 달을 미루던 작은 수술을 받았다. 모른 척 덮어두었던 몸의 작은 이상이었지만 코로나 덕에, 휴직 덕에 마음 편히 수술을 했고 오래도록 회복을 했다. 조금씩 길어진 해를 잡고 브런치를 즐기고 한낮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며 겨울 마무리.


3. 3월

이른 벚꽃을 보며 불쾌한 마음을 덜어냈던 3월. 그러다 어느 날 어떤 마음이 관건이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들이 모여 폭발했던 초봄. 만약 3월에 출근하지 않았더라면. 복직하던 달이 달랐더라면 올해 벌어진 모든 일의 인과관계가 무효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3월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4. 4월

면접을 봤다. 그것도 여러 차례. 거의 5년 만에 검정 정장을 아래위로 샀다. 면접을 한 회씩 넘길 때마다 맘 속 어딘가가 후련해졌다. 안동 농암종택과 부산 기장 여행을 마치면서 아마도 이대로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직에 실패하더라도 그냥 그대로 무소속이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 이룬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5. 5월

첫 출근. 처음 지하철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라는 말이 생각보다 빨리 터져 나왔다. 봄이라고 하지만 꽤 추웠고 비가 많이 내렸다. 5월의 날씨들이 하루하루 많이 기억난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어 좋았다.


6. 6월

어느 주말엔가 화담숲을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또 개인적으로 치유가 되는 부분도 있고 매일매일 챌린지인 것 같은 새 직장’이라는 짧은 일기를 썼다. 몇 년 만에 여름휴가를 진작부터 포기했다. 오랜만에 여름이면 매년 즐겨먹는 방화동 고성 막국수를 먹었다. 그거면 됐다.


7. 7월

중간 우물이 멋들어진 그라운드시소 서촌을 결국은 가보지 못한 채 남편은 전시회를 다녀왔고 큰 액자와 도록을 사다 주었다. 휴가나 여행을 반납한 대신 사고 싶었던 의자와 테이블을 구입했다. 입사 후 예정되어 있던 PT와 시험 그리고 여러 과제를 마친 후였다. 일희일비의 7월.


8. 8월

오랜만에 꽃 수업을 들었다. 6번의 짧은 코스. 아마 나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꽤 지치고 힘든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첫 방학을 보내면서 단축근무의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고 첫 임신을 경험하고 또 오래지 않아 끝내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9. 9월

선배가 보내준 전복을 먹어가며,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내준 과일과 고기를 먹어가며 꾸역꾸역 체력을 올렸다. 9월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가장 좋아하는 가을이고 곧 연말이 올 것 같다는 괜한 기대감이 좋았다. 양양 바닷가에 앉아 1-2시간씩 파도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았다. 게다가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1박 2일이어도 11박 12일 같은 치유였다. 좋았다 9월.


10. 10월

이사를 결심했다. 임신과 유산 후에 여행이나 보복 소비로 모든 관심을 돌리다 못해 결국은 집을 사고야 말았다. 남편은 창가를 둘러싼 나무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도 그 앞에 식탁을 두고 앉아있고 싶었다. 단풍이 가득한 캠퍼스에서 두 번째 유산을 겪고 이제는 겨울마저 끝나기를 기원했다. 올해가 이렇게 다사다난할 줄 1월 생일에 다이아 목걸이를 살 때만 해도 몰랐었다.


11. 11월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영영 못 가는 줄 알았던 호텔 뷔페를 다녀왔다. 거의 1년 반만이었지만 예약은 정말 하늘에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려웠다. 2주에 한 번씩 연차를 내고 대출과 인테리어를 알아보러 다녔다. 임신과 유산을 연이어 마주하니 회사 일 따위 내 마음의 짐을 덜지도 더하지도 못했다. 일은 점점 익숙해지고 나는 점점 나태해지는 시즌. 오히려 좋았다. 주말근무로 점철된 가을이 지나면 겨울방학이니까.


12.12월

아무 계획 없던 크리스마스. 남편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던 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남편은 케이크를 픽업해 할머니를 뵈러 갔고 이윽고 임종을 지켰다. 1월부터 12월까지 단 한순간도 쉬이 넘어가지 않았지만 할머니 덕에 온 가족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철없이 간식도 먹어가며 연말을 보냈다.



올 한 해는 인생의 가장 큰 선택과 결정과, 가장 큰 기쁨과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다시없을 번거로운 결단과 내 발아래 세상이 흔들리는 새로움을 겪는 격동의 한해! 였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3월의 복직을 멈추는 게 좋은지 5월의 입사를 멈추는 게 좋은지 8월의 나로 돌아가 4mm 아기를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누워있는 게 좋은지. 혹은 다시 한번 올 한 해를 보내더라도 이렇게 보내는 것이 역시나 최선일지 잘 모르겠다.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차라리 생각을 마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그 한 해의 끝에 나에게 늘 ‘색시’라고 부르시며 새 지폐가 들어오면 잘 모아두었다가 하얀 봉투에 잘 담아 생일마다 용돈을 쥐어주시던 할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이토록 고요하고 찬양이 넘치는 장례를 맞이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내년엔 어떤 해였으면 좋겠냐고? 그저 건강하고 평안한 한 해였으면 좋겠다. 우리 두 사람이 그리고 우리의 부모가 가까운 친구가 모두 안녕하기를. 내 세상이 좁아지고 혹은 넓어지는 여러 상황 속에서도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새해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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