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에서 겨울까지, 대만 타이베이.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한 덕에 입사 후 여권 면이 부족하도록 해외 출장을 다녔다. 결국 새 여권을 받았고 아마도 그 즈음부터 타이베이 출장을 다니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게 바로 초여름 이었으니까 그렇게 시작한 출장이 겨울이 되어서야 마침내 끝이 났다. 그렇게 지난 계절의 타이베이가 고스란히 사진첩에 남아 있어 이 글을 적어 본다.
10년 전 캄보디아 여행을 가던 중 타이베이에서 환승을 했던 게 아마 나의 첫 타이베이 기억이 아닐까 싶다.
불 꺼진 공항의 전등이 삽시간에 흔들렸던 기억,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 한 분이 의자 아래로 반듯이 누워 “지진이다!” 라고 외쳤던 기억. 그 이후로 두 번 정도 더 타이베이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딱히 기억할 만한 것들은 없었다. 아마 그 몇번의 방문 중 가장 의미 있었던 건 상인수산(上引水産)이 아니였을까.
타이베이를 다니면서 가장 좋아했던 곳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단연 타이베이 수산시장인 상인수산(上引水産)이라고 대답할 거다. 식사 시간대에는 늘 대기가 있고 현금 계산 밖에 안 된다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좋아하는 곳. 맨 처음 선배를 따라 갔다가 그 분위기와 맛에 반해 버려 어쩐지 매번 가게 되었다.
상인수산에는 스시 바와 샤브샤브 그리고 BBQ 식당이 있었는데 스시 바는 스탠딩, 나머지 두 곳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스시 바의 디럭스 스시 세트가 우리 돈 25,000원 정도로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이미 맛집. 그리고 장국이 예술. 맥주나 와인을 곁들여도 좋다.
또 하나의 좋아하는 장소는 화산 1914 창의문화원구로 카페와 상점과 예술단지가 조화롭게 뒤섞여 있는 곳인데 사진 속의 카페 겸 잡화점인 소일자(小日子)도 그 곳에 있었다. 대만의 문구류와 잡화를 소개하고 판매하는 곳.
원래 이 공간은 양조장으로 쓰였다고 하니 인더스트리얼한 문화는 우리나라 서울의 성수동과 비슷한 것 같다.
그 넓은 공간 중 어딘가에는 숲 속의 스타벅스도 있었다.
예전에는 여행지 곳곳의 스타벅스에서 시즌 MD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제는 스타벅스 말고도 로컬 커피집들을 찾는 것이 더 재미있어 이전의 재미는 관둔 지 오래였다. 물론 벚꽃 철의 일본 스타벅스 MD나 크리스마스 시즌의 대만 스타벅스 MD는 조금 다른 사정이긴 하다.
몇 번이나 기웃거리며 들어보기까지 했던 법랑 컵은 결국 마지막까지 사지 않았지만 마지막 출장에는 산타 곰돌이 키링을 사 왔다. 왜 인지 당분간 갈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여름에 가게 된 어느 한 번의 출장을 마치면서 마침내 타이베이에서 주말을 보낼 기회가 생겼다. 처음으로 캐리어에서 반바지와 슬리퍼를 꺼내 호기롭게 밖으로 나섰다.
한 여름의 타이베이는 어찌나 덥던지 우리나라 폭염에 습기를 끼얹은 더위였다. 실내에서 고상하게 원피스나 입고 일할 때는 몰랐던 더위라 당황했지만 왠지 모를 이국적인 느낌에 부지런히 구석구석을 걸었다.
그렇게 들러 본 쿠키살롱 BUT. we love butter. 처음에는 동네가 너무도 고상하고 여유로워 이런 곳에 있는 쿠키집이라면 분명 예사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 예상은 정말로 적중했다. 입구는 영화 킹스맨의 테일러샵을 닮아 독특했고 살롱 내부는 몹시도 감각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오늘의 쿠키와 간단한 차를 내어 주며 주문할 수 있는 쿠키가 담긴 메뉴판을 건넨다. 카페가 아닌 쿠키살롱이기 때문에 메뉴판에서 고르는 쿠키는 당장 먹을 용도가 아닌 구입 그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두어 번 정도 다양한 쿠키를 구입해 보았는데 선물용으로도 간식용으로도 좋았다. 쿠키를 고르기 어렵다면 포장지를 고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 6개입과 10개입이 2-3만원 전후로 역시 싸지 않지만 이 곳 역시 나에게는 이미 맛집.
어쩐지 쉬어 가는 동안 먹고 싶었던 것들만 먹은 느낌이 있긴 하지만, 정말 아름답게 꾸며 진 우육면 집에 들러 간단히 식사를 했다.
조금은 낡은 감이 없지 않은 건물 2층에 자리한 시유 (時寓。Shiyu) 는 각종 앤틱 가구, 시계들로 꾸며져 있었다.
좋아하는 많은 것이 모여 있던 곳. 예를 들면 크고 넓은 원목 식탁과 희고 군더더기 없는 벽, 정돈된 식재료와 선반같은 것들이 그러했다. 이런 다이닝 룸 대환영!
우육면은 넓거나 일반인 면을 고르거나, 맵거나 일반적인 탕을 고르는 등 선택할 수 있었고 조미료 없이 요리한다고 설명해주었다. 타이베이에 많은 우육면 집들이 있겠지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즐기기에 이 곳도 참 좋았다.
한 여름이었지만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온천도 들렀다.
여러모로 기동력이 떨어져 버스를 타고 1시간 여를 달려 신베이터우(新北投)의 온천에 가는 길, 나무 외벽이 아름다운 도서관에 들렀다. 이맘때쯤 푹 빠져있던 어떤 소설책 속의 목조건물이 생각 나 여기저기를 구경했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녹음에 파묻힌 도서관이 많겠지만 사실 도심에서 발견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라 이런 도서관들을 보면 내심 부럽기도 했다. 특히 어린이 구역이 꽤 잘 나누어져 있어 어린이들도 많았던 작지만 알찬 느낌의 도서관.
최근에 한국에서 본 이런 느낌의 도서관은 아마 대학 캠퍼스 내 중앙 도서관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아쉬웠다.
도서관을 빠져 나와 미리 전화로 예약해 둔 골든 핫 스프링(金門)온천에 갔다. 온천을 길게 즐기며 숙박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90분 코스로 예약했는데 피로를 풀기에 여간 좋은 게 아니였다.
점심보다 조금 이른 시간으로 예약하니 할인을 받아 90분에 우리 돈 3만원 정도가 나왔다. 2인용 프라이빗 룸에 냉온탕이 각각 있고 간단히 옷을 갈아 입고 짐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미리 사 둔 망고에 맥주까지 곁들이니 이런 호사가 따로 없었다.
온천을 즐기고 노을지는 시간에 맞춰 샹산에 올랐다.
코끼리 상아를 본 뜬 글자 ‘상(象)’ 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 산 곳곳에 코끼리 모양의 벤치가 귀여웠고, 관광객도 현지인들도 가볍게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볍게 오를 수 있는 동산들이 꽤 있고 제주도에 내려가면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오름이라면 금방 올라가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 마시고 내려오곤 하니까. 이런 ‘걸을거리’들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는데 막상 샹산에 올라 야경을 구경하니 왜 인지 조금 부럽기는 했다.
여러모로 짧았던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온천에 등산, 그리고 야경까지 구경하고 호기롭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마 당분간 타이베이 출장이 없겠지 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또 같은 호텔 방에 앉아 차와 맥주와 망고따위를 사 와 앉아 있었다. 아마 지난 출장의 끝에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지 못했더라면 진작에 질려버렸을 텐데 라는 마음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얼마 전 일을 마무리 하러 갔던 마지막 출장 때, 처음으로 비 내리는 타이베이를 마주했다. 겨울의 타이베이는 이렇게 비가 온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그 잦은 출장에 늘 날씨가 좋았다는 것도 감사, 아프지 않고 잘 먹고 잘 자고 일한 것도 감사했다.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공을 들이고 정성을 들인 곳이 또 어디 있겠냐고 말했지만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섭고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던 일이었다. 든든한 선배와 동료들이 처음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면 혹여나 뒷받침이 되어주지 않았더라면 한 달에 한 번 공을 들인다해도 택도 없었을 일.
앞으로는 일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가보련다. 타이베이. 이왕이면 여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