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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Feb 23. 2021

2월 22일 월요일

저도 예전엔 마른 체형이었거든요

1. 살이 쪘다

바야흐로 때는 2009년 북경 유학을 이어가던 20대 초반의 나는 뚱뚱했다. 오늘 이 문장을 적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얼마 전 그 시절 사진을 보고 뚱뚱했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보다 10킬로 정도 더 쪘었고 그 시절 유행하던 꽃받침을 한 사진을 보면 손바닥이 족히 3개는 있어야 얼굴이 가려질 정도였다. 옷과 신발이 하나도 맞지 않아 옷 도매 시장을 들락날락 거리며 옷을 사 입었다.


6개월 정도 요가와 식이조절을 병행하며 10킬로를 거의 다 덜어냈고 인생 첫 다이어트는 꽤 성공적이었다. 물론 요가 전후로 쉼 없이 먹어댔던 육즙이 흐르던 고기만두와 버블 밀크티의 맛은 종종 그립긴 하지만 여튼 그 시절 나는 최고 몸무게를 경신했고 운 좋게도 단박에 다이어트를 성공할 수 있어서 그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살을 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대의 다이어트란 덜 먹고 더 움직이면 젊음의 버프로 가능한 범위였다.


2. 먹는 즐거움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추구하는 우리 부부에게 먹는 즐거움이란 아주 강력한 삶의 지표 중 하나가 되었다. 남편과 친구로 지내던 대학시절 우리는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먹었다. 고깃집에 둘러앉아 4인분을 해치우고 점심에 만나서는 야식까지 알차게 챙겨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엔 빨대 꽂은 캔맥주를 손에 쥐고 동네를 몇 바퀴씩 걷곤 했다.


처음 남편이 나에게 연애를 제안하려던 날 고깃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하트 모양 불고기가 불판에 오르는 순간 나는 고백을 직감했고 아주 빠른 속도로 식사를 마치고 영화를 보고 부랴부랴 헤어졌다. 돌이켜보면 20대 어느 남녀가 불고기를 앞에 두고 연애를 시작하네 마네 간지러운 이야기를 나눌까 싶지만 우리의 모든 시간은 먹는 것과 연결되어 있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숱한 여행을 함께 다니며 숙소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던 건 '그 식당'을 '예약'할 수 있느냐였다. 수십여 통의 국제전화를 거쳐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교토의 장어집을 예약하기도 했고 영화에서 봐 뒀던 뉴욕의 여러 레스토랑에 이메일을 보내 황금 시간대 테이블을 선점하기도 했다. 그렇게 먹고 마시는 동안 살찌지 않았던 이유를 돌이켜보면 출퇴근으로 다져진 하루 만 보의 상당한 산책량과 밤낮으로 외출했던 그간의 부지런함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이다.


3. 그렇게 살이 또 쪘다

항공사는 멈췄고 나의 휴직은 무한정으로 늘어났다. 그 무렵 남편의 재택근무가 시작되고 우리 부부의 먹는 즐거움은 때로 전문적인 수준에 이를 정도로 배양됐다. 간장을 잔뜩 졸여 피클을 만들어내고 연어장을 한 통 가득 담갔다. 고작 한 끼 식사를 위해 밤낮으로 꼬박 끓여 입 안에서 부서지는 김치찌개 한 솥을 만들곤 한다. 반찬의 가짓수를 늘려가며 삼시세끼 양껏 식사를 챙겨 먹으며 오래지 않아 살이 찌겠다 싶긴 했다.


작년 봄 꽤 오랜만에 체중계에 올랐고 바지를 입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후에야 폭식을 멈출 수 있었다. 저탄고지 다이어트를 감행했고 우울감에 매일 밤 베갯잇을 적셨지만 3개월 만에 겨우 살을 덜어냈다. 5킬로그램. 여름 내내 산책과 요가를 병행하며 몸무게를 유지했고 겨울을 보내면서도 꽤 슬림한 체형을 유지했지만 어제 체중계 위의 나는 또다시 5킬로그램이 증량됐다. 주말 저녁 시켜먹은 양념치킨과 몇 주간 밤마다 구워 먹은 가래떡이 원망스러워졌다. 저탄고지는 못 해 먹겠고 덴마크 다이어트는 방울토마토가 물려서 싫다. 여전히 먹고 싶은 음식은 많은데 이번엔 어떻게 이 난관을 돌파해야 하는 걸까.


4. 오래도록 천천히

어젯밤 체중계에 찍힌 숫자가 기가 막혀 오늘 아침까지 5번도 넘게 다시 체중계에 올랐다. 여전히 그 숫자. 지난밤 틀었던 넷플릭스에서 쉼 없이 음식을 먹어대는 통에 야식의 유혹이 상당했지만 꾹 참았다. 그 대신 오늘 아침에 먹겠다며 호기롭게 잠에 들었다. 아침 10시 남편이 사 온 기름진 해시브라운과 맥모닝을 먹으며 참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먹는 즐거움을 미루는 것. 이것이 이번 나의 난관 돌파 기조인 것으로.


최근 몇 주간 일주일에 3번씩 요가를 수련하고 있다. 다이어트는 그 수련의 1할도 차지하지 않는 아주 작은 이유이지만 요가를 한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몸 상태는 아주 많이 다르므로 꾸준히 수련하고 있다. 날이 풀리고 전염병도 풀리면 하루 만 보쯤이야 거뜬히 걸어내는 생활이 시작될 테니까 건강한 (하지만 납득 가능한) 몸무게를 유지해보려고 한다. 오래도록 천천히 꾸준히 건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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