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면이지만 초면인 수영
언제부터였나.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1인 1운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서로의 근황을 묻는 질문들이 오가다 보면 꼭 물어오는 질문이 '요즘 뭐 운동하는 거 있어?'였다. 그 질문에 모두들 저마다 하고 있는 운동을 답한다. 러닝, 킥복싱, 테니스, 주짓수, 수영, 요가, 필라테스, 골프, 헬스. 종목도 다양하다. 자연스럽게 오가는 운동 근황 토크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다. 어물쩍거리며 '그래.. 맞아, 맞아 이제는 살려고 운동을 해야 한다니까.' 하지도 않는 운동의 필요성에 억지로 공감하면서 '그래... 나도 운동해야 하는데, 진짜 올해는...' 하며 공허한 다짐을 한 것이 어언 3년쯤 되었다. 대체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당연하게 운동 근황을 묻는 세상이라니. '요즘 뭐가 제일 맛있었어?' '최근에 새로 발견한 맛집 있어?' 흥미롭고 군침 도는 맛 근황을 묻는 세상은 왜 오지 않느냔 말이다. 투덜거림과 함께 이 바지런하고도 건강한 1인 1 운동 시대의 흐름을 함께 타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부대끼는 마음이 있었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짜임새 있게 활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드라마 보기나 다이어리 꾸미기 같은 나의 정적인 취미들이 운동보다는 덜 생산적이라고 생각되어서? 운동 근황 토크에 참여할 에피소드가 없다는 소외감 때문에? 수년 째 운동 하겠다는 말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나에 대한 한심함 때문에? 마음의 부대낌이 정확히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의 부대낌은 따뜻한 방구석에서 뒹굴고 싶은 내 욕구를 오랜 기간 이기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드디어 운동을 시작했다. 종목은 수영. 물은 좋아하지만 수영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었기에 (2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자유형까지도 못 가고 포기했던 과거 이력이 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발 담그고 싶은 종목이었다. 마침 옆에 있는 친구도 새벽반에 등록한다고 한 것이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저녁 6시에 시작하는 수영 강습을 가기 위해선 나답지 않게 날랜 몸놀림으로 교실을 나서야 한다. 책상 정리와 마무리하지 못한 여러 일들을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강제 칼퇴를 감행했다. 3월 2일 개학날은 치킨에 맥주 한 잔 하면서 나에게 기름진 보상을 주어야 마땅한 날인데 퇴근하자마자 수영이라니. 갱생의 날이다.
첫날이라 서두른 덕에 아직은 조용한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이제 나의 첫 수영 수업을 위해 수영장 문을 열었다. 저녁 6시,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오기엔 꽤 무리인 시간대. 함께 강습을 듣는 사람들의 연령대로 어르신들을 예상했다.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초등학생 30여 명이었다. 뭐지 이 익숙한 소란스러움은. 아찔했다. 이 어린이들이 정녕 나의 수영 동지들이란 말인가. 나는 오늘 하루종일 새로 만난 어린이들과 밀고 당기고 지지고 볶다가 왔는데. 지난 11월에 다녀온 생존수영 체험학습이 생각났다. 아이들은 흥이 나서 헤엄을 치고, 수영 강사님들은 종종 아이들을 들었다 메쳤다 신나게 몸으로 놀아주는 광경. 나를 더 당황하게 한 것은 유리창에 다닥다닥 붙어 서서 수영 강습을 참관하고 있는 어머니들이었다. ㅗㅜㅑ... 그중에 우리 학교 학부모님이 계실리는 없지만 괜히 움츠러들었다. 낯선 공간에서 어린이들 사이에 오도카니 서서 새벽반으로 옮겨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와중에 성인반 수강생분들이 오셨다. 소중한 다섯 분...♥ 짙은 내향인의 나를 먼저 말 걸게 할 정도의 반가움이었다.
준비운동은 무려 국민체조였다. '국민체조 시~작'을 외치는 딴딴한 목소리와 추억의 음악, 몸이 기억하는 동작들. 속으로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어린이들아, 보아라. 이것이 바로 국민체조 세대의 절도 있는 각이다. 선생님은 소싯적에 이걸로 수행평가도 쳤어요~' 내면의 소리를 이기고 시범 보이는 강사님보다 더 정석으로 하려는 동작을 애써 흐트러트리며 준비 운동을 마쳤다.
소수인 성인반은 한 레일을, 나머지 레일은 모두 어린이들의 차지였다. 다섯 명의 성인반은 수준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 수영 초짜 1인(=나), 10년 전에 평영까지 배우신 아저씨, 6년 전에 접영까지 한 청년. 이렇게 세 명이 초급반으로 묶였다. 나의 수영 동지들인 것이다. 오늘은 음-파 호흡, 물에 뜨기, 발차기를 배웠다. 그런데 나... 수영에 소질 있는 걸까? 수영 동지 아저씨께서 아가씨는 처음 배우는 것이 절대 아닌 것 같은데~ 하시면서 재차 확인하셨다. 동급생의 견제인가. 거기에다 '아.. 처음은 아니고 제가 6년 전에 몇 주 배운 적이 있는데 학교에서 직원 체육으로 하지도 못하는 배구를 하다가 어깨가 빠지는 바람에.. 자유형까지도 못 배우고 그만뒀습니다.' 부끄러운 이력을 구구절절 설명할 순 없었기에 '호호호 제가 물을 좋아해서요' 하며 넘겼다. 아마 비결은 나의 내장 지방이 유력하다. 기름은 물에 뜨지 않던가. 강사님은 가라앉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계속 알려주셨지만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자꾸만 떴다. 몸속 기름의 힘으로 물속을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었다. 배에 구명조끼를 하나 달고 있는 셈이다. 수영 동지 아저씨도 꽤 성능 좋은 구명조끼를 보유하신 것 같던데 그 위력을 십분 발휘해 보시길 바란다.
염소 팍팍 뿌린 수영장의 소독약 냄새도, 물이 주는 촉감에서 느껴지는 청량감도, 땅에서보다 부드러워지는 움직임도 좋았다. 씻고 물에 들어갔다 또 씻는 번거로움도 생각보다 견딜만했다. 아직 수영의 ㅅ자도 못 그린 정도이지만 운동량도 굉장했다. 숨이 차고 온몸에 힘이 쪽 빠졌다. 땀이 나지 않는 쾌적함도 좋다. 드디어 나랑 코드가 맞는 운동을 찾은 걸까. 수십 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시간 외 근무를 하는 듯한 피로감은 시간이 해결... 해주겠지?
나는 이제 당당하게 답할 수 있겠다.
'나는 요즘 수영해.'
'수영 진짜 재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