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쇼, Show, 쑈! 의 달이다. 날씨가 좋아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를 열기 좋거니와 보여줄 실적들이 충분히 쌓였을 만한 시기다. 음악회, 교육과정 발표회, 교육청 행사 부스 전시까지. 이번주와 다음 주에 몰린 행사들로 몸과 마음이 분주하다. 환경을 구상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쓰이는 정신적 수고로움에 만들고 치우고 쓸고 닦는 몸의 노고가 더해져 나는 점점 소진되어 간다. 내 남은 체력과 정신력까지 모두 끌어모아 보여주는 모든 쇼들을 끝낸 후에 맥주 한 잔의 취기와 함께 침대로 장렬히 전사할 그날을 기다린다. 일단 해야 할 것을 하자. 난 책임지는 어른이니까.
과도한 일에 치여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단단한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 분주함 속에서도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다정함의 원천은 체력이다. 체력 배터리 잔량 1% 띄우고 꺼질 듯 꺼지지 않으며 버티고 있는 요즘의 나는 다정함을 잃어버렸다. 대꾸할 힘도, 웃어줄 여유도, 너그러이 넘기는 이해심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우리 반의 아침 루틴은 내 책상 옆에 한 줄로 서서 차례로 하나의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것이다. 질문은 거의 "선생님, 오늘 아침에 뭐 드셨어요? 저는 코코볼 먹었어요." 이거나 "선생님, 어제저녁 뭐 드셨어요? 저는 아빠가 해주신 된장찌개 먹었어요."처럼 나의 식사 메뉴를 묻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렇게라도 한 명씩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하루종일 나와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어 올해부터 교실에 들인 아침 루틴이다. 시작한 의도는 좋았으나 루틴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중요한 조건은 '교사의 체력'이다. 아침 메뉴를 묻는 질문에 "아무것도 못 먹었어. 이제 커피 마시려고." 퀭한 눈으로 커피 잔을 들어 올리는 선생님을 보며 아이들은 어른의 고단함을 배우게 되려나.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신발장에서 슬리퍼로 갈아 신는 나의 기척에
"와!!!! 선생님 오셨다---!" 하며 우르르 줄을 서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매일 아침 거창한 환대를 받는 출근이 가능한 나의 일터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의 에너지 넘치는 기세가 버겁다. 출근하자마자 기가 홀랑 뺏기는 기분이다. 컨디션 관리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교실의 문제다.
교육과정 발표회(구 학예회)에 전시할 시화 작품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공개적으로 전시할 작품이다 보니 완성도에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열심히 피드백을 하며 시화를 그리는데 손을 데지 않고 자꾸 앞과 옆 친구에게 장난을 걸며 방해하는 아이가 보였다. 결국 버럭 했다. 아이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작품의 배경을 칠할 때는 색연필을 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깔끔하게 칠해진다. 중구난방으로 색연필을 휘두르면 지저분한 자국이 남는다고 여러 번 말했다. 여러 번 말해서 안 들으면 한번 더 말해주면 된다. 못하면 옆에 붙어 다시 가르치면 된다. 그게 내 일이다. 중구난방 색연필 난도질이 쳐진 종이를 보고 난 또 버럭 했다. "얘들아, 제발!!!!!!!" 인내심과 말을 담을 그릇을 고르는 사려 깊음은 체력에서 나온다.
쉬는 시간 보드게임을 하는 교실 뒤편에서 들리는 소리. "너 이거 못하면 게이, 고추 없음". 이런 혐오와 차별에 성희롱까지 더해진 말을 열 살짜리들은 어디서 듣고 친구를 조롱하는 말로 쓰는 건지. 압정이 뾰족하니 조심하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손가락에 피를 내는 건 나를 무시하는 건지, 아이가 부주의한 건지. 오늘따라 휴대폰은 왜 안 끄고 자꾸 알림이 올리는지. 오늘따라 교실과 복도에서 뛰는 애들은 왜 이리 많은지. 오늘따라 교실은 왜 이리 소란스러운지. 오늘이 유난히 말은 안 듣는 날인 것인지, 오늘이 유난히 체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날인건지 헷갈린다.
쭈그려 앉아 청소를 하다가 일어나니 머리가 핑 - 돌면서 잠깐 눈앞에 하얘지는데 중심을 잃고 주저앉을 뻔했다. 이 증상까지 겪고 나니 정말 체력이 바닥이 났구나 싶었다. 아직 해내야 할 일정이 많은데, 아직 겨울방학은 세 달이나 남았는데. 체력과 다정함이 모두 동이 나버리면 우리의 끝이 뾰족하고 쓴 마음으로 마무리될까 걱정된다. 초록창을 켜서 "체력 회복에 좋은 영양제"를 검색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