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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Oct 05. 2019

이별을 대하는 태도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년 10월 5일 토요일, 78번째


오늘 좋아하던 가게가 문을 닫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 어제만 해도 그대로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간판이 바뀌고 내부 공사 중이더군요. 괜히 슬퍼졌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달에 한 번이라도 더 갈 걸 그랬습니다. 이제와 후회해도 늦었습니다. 별 수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이별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평생 동안 얼마나 많은 이별을 마주하게 될까요.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장소나 물건, 혹은 반려동물이나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 길고 긴 자국을 남기는 경우도 있고, 금세 잊히기도 합니다. 저에게 있어 이번의 이별은 과연 며칠이나 이어질지. 어쩌면 이별이라 이름 붙이는 것도 너무 호들갑 인지도 모릅니다.


엄청난 추억이 있었던 곳은 아닙니다. 타코와 브리또 같이, 멕시코 요리를 주력으로 하는 가게였는데, 나쵸와 맥주가 맛있어서 나름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요. 포장을 해가는 날에는, 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맥주 한 잔을 꼭 곁들였죠. 시나몬 스타우트 한 잔이면 기다리는 시간마저 즐거웠습니다.


무엇보다 나쵸가 훌륭했습니다. 흔히 술집에서 내오는 식어빠진 나쵸를 시판되는 치즈 소스에 곁들인 정도가 대부분이고, 칠리가 더해지면 신경은 좀 썼다고 여길 수준인데 여기는 달랐습니다. 갓 튀겨 나와 바삭한 나쵸와 그 위에 뿌려진 소금과 허브 덕에 먹을 때마다 경쾌한 식감과 짭짤한 맛이 남달랐습니다.


거기에 고기의 질감이 느껴지는 매콤한 살사 소스에, 데워서 나온 치즈의 눅진하고 부드러운 맛. 나중에는 과카몰리까지 주문해서 먹어보았는데, 이게 또 별미더군요. 왜 이걸 진작에 알았는지. 그러나 이제는 대체 이 맛을 어디서 느끼나요. 거리가 가까운 곳에 멕시코 요리를 하는 술집이 또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사진이라도 찍어두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실컷 적어놓고 '엄청난 추억이 없었다'는 말을 해본들 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그래도 달에 한 번 가는 정도였고, 엄청나게 상심한 건 아니니 짐짓 괜찮은 척을 해본 셈입니다. 그저 이별할 시간이라도 주어졌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죠. 최소한 가게가 닫기 전에라도 찾아가 보았더라면.


그렇습니다. 이별은 피할 수 없고, 결국엔 이 삶 그 자체와도 이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별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 정도입니다. 한 동네에서 5년 가까이 살면서, 눈에 익힌 풍경과 마음에 둔 가게가 바뀌는 걸 볼 때마다 묘한 감각이 드는데 이번에는 좀 서글펐습니다.


9월 중순에는 좋아하던 카페가 문을 닫았는데 그 사실을 일주일 전쯤에 알았지요. 8월 내내 집에만 있다가 그달 말에 찾아가니 덜컥 바리스타 분께서, 앞으로 영업일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 주 내내 그곳에 찾아갔습니다. 제 나름대로 '보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으니까요.


카페에 가지고 있는 애정이 남달랐는데, 그래도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이별을 받아들이기까지 유예와 시간이 있어서 였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만,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자연히 멀어지기도하고, 일부러 끊어버리기도 하니까요. 관계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는 듯도하고.


어쨌거나 '보내기'의 시간이 이별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듯합니다. 일종의 '정 떼기'라고 해야 하나요. 예전에는 그러한 정 떼기를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하는 실수도 저질렀습니다. 어차피 헤어질 사람인데 굳이 정을 붙이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것도 웃긴 노릇이라는 걸 알고는 그러지 않으려 합니다.


헤어지려 애쓰지 않아도 언젠가는 헤어질 것이고, 이별의 순간이 두려워 정이 뗀다는 건 이상하죠. 차라리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유명한 트로트 노래도 있죠.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네, 정말로 할 수 있는 건 그뿐입니다. 이별의 그 순간까지.



며칠 전, 거리를 걷는데 허름한 슈퍼 입구에 '오늘까지만 영업합니다.'라고 적어두신 걸 보았습니다.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곳었는데도 그곳에 슈퍼가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뿐이지 의식하지 않았는데, 그곳에 다른 가게가 들어설 거라니 괜히 감상에 젖게 되더군요.


굳이 살 것도 없으면서 가게로 들어가, 박카스를 2병 사서 하나는 주인분께 드렸습니다. 뭐하는 사람인가 싶으셨을 겁니다. 제가 생각해도 괜한 오지랖이었나 싶으니까요. 그래도 뭔가가 끝난다는 것,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라 뭐라도 해보고 싶었나 봅니다.


그때는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이 뭔지 잘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었나 봅니다. 나와 상관없는 것조차도 떠나보내야 할 때는 그토록 애절한데, 나와 함께 숨 쉬고 내가 애정을 가진 것들에 대한 이별은 별다른 생각 없이 보내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요. 모든 이별을 일일이 느끼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랬다간 인생의 모든 순간을 애도만 하다가 끝날 겁니다. 그럼에도 적절한 애도를 해야만 다음 만남도 더욱 기쁠 수 있고, 앞으로의 인생도 더욱 잘 살 수 있는 거겠죠. 그러기 위해서라도 충분히 슬퍼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후회와는 조금 다릅니다. 떠나보낸 것들을 생각하며. 그것들이 내 인생에 한순간이라도 있었다는 기적 같은 사실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그와 같은 기적이 있을 거라 믿고, 지금 당장은 슬프고 힘들지만 그러한 이별을 받아들이는 시간. 모쪼록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셨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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