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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Oct 04. 2019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중심 잡기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년 10월 4일 금요일, 77번째


세상은 빠르게 변합니다. 지난 세기 동안 이루어진 문명의 발달은 인류가 걸어온 반만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급격한 변곡을 보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습니다. 특별한 문제가 없이 변화에 보폭을 맞춰가는 듯이 보이지만, 때때로 헛디디거나 방향을 헤맬 때가 있죠.


속도가 아주 빠르기 때문에 방향감을 상실한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이 정답인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확고부동한 사실과 불변의 진리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절대적인 사실이라는 거죠.


정답이 없다는 걸 감당하기에는 인간은 몹시도 나약합니다. 어딘가 마음을 기댈 곳을 찾습니다. 네, 종교가 대표적입니다. 가족뿐만이 아니라 친구, 혹은 주변에서 종교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요즘엔 예전만큼 종교를 신실히 믿는 분이 많지 않은 듯합니다. 이 또한 시대의 변화겠죠.


위키백과에 '종교'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이미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들의 심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교인이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 또는 종교가 더 이상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게 없다'는 말은 곧 절대 그 자체로 표상되는 신 또한 없다는 논리로 이어져도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신이 있냐 없냐는 문제보다도 믿음 자체가 중요합니다.


믿음. 무엇을 믿으며 살 것인가. 종교의 경우는 신이나 경전의 말씀이 될 것이고,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 자라면 삶을 대하는 자기만의 신념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이 문제는 참말이지 어렵습니다. 어딘가 의탁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이 같은 의문은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익스플레인:세계를 설명하다 - 믿음의 함정>을 보고 난 후 더더욱 증폭되었습니다.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더군요. 종교를 믿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영상에서도 '신념 체계'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종교의 이름 하에 행해지는 억압과 착취입니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이비 종교에 대한 글을 마주할 때마다, '어떻게 그런 걸 믿을까' 싶지만 의외로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절박한 순간에 처했을 때, 인간은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기 바라니까요.



손을 내미는 이의 얼굴이 악마의 모습일지, 천사의 모습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판단력이 흐려져 있기에 악의와 선의를 구분하기 힘듭니다. 또는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나를 받아들여주는 손은 너무나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거듭해서 거부당하다 보니, 이 손마저 내치면 다음이 없을 것 같다는 기분마저 들 테니까요.


그렇기에 문제는 단순히 종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종교를 넘어서서 '판단'의 문제입니다. 인생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고, 종종 그 선택은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단순한 예시를 하나 들겠습니다. 오늘 점심 대체 뭘 먹어야 할까요? 한식? 중식? 일식? 양식? 중식으로 정했다고 칩시다.


여전히 선택이 남아있습니다. 짜장면? 짬뽕? 볶음밥? 울면? 이 정도는 사소한 선택이죠. 그러나 이 무수히 많은 선택을 마주하며 우리 자신은 알게 모르게 닳아갑니다. 이른바 '선택 장애'라는 신조어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선호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잘 알아야 하는데 막상 선택을 앞두면 망설여집니다.


어떤 애플리케이션은 아예 선택을 대신해주기도 합니다. 대체 나의 선택인데 왜 누군가의 의견을 신경 써야 할까요. 물론 타인의 관점도 참고해야 합니다. 독불장군이 되자는 이야기는 아니죠 그러나 어떤 의견보다도 귀 기울여야 할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인데도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로만 느껴집니다.


JUSTHIS & Paloalto - Cooler Than the Cool (feat. Huckleberry P)의 가사 중 하나


선택의 가짓수가 굉장히 많고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게 어려운 일이라 그렇습니다. 덧붙여 자신의 판단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그에 따른 결과마저 감당해야 하는 게 선택, 나아가 인생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광활한 선택의 자유 앞에서 자주 망설이게 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난 인류 중 누구도 누리지 못했던 거대한 자유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냥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자유가 오히려 우리를 억죕니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더 많은 돈과 물건을 가져야 할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결과에 대한 책임도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선택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고, 작고 폐쇄된 세계 안에서 웅크리고 있고 싶다는 욕망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의 말대로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셈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순간에 오롯이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어렵더라도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자기중심을 잡아가면서 말이죠.


중심을 잡는 일은 어느 하나로 되지도 않으며, 단기간에 성과를 보이지도 않습니다. 길고 긴 인생의 매 순간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설사 실패해도 수정하며 바꾸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는 앞서 말했듯, 두렵습니다. 모든 걸 그르칠 것 같죠.


생존을 위해 부정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우리의 뇌.


우리의 뇌가 여전히 동물일 때의 메커니즘을 버리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수풀에서 포식자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아니었더라면 진화는커녕, 뱃속에서 사라졌겠죠. 그러나 더 이상 포식자가 나타나지 않을 이 순간에도 우리는 온갖 염려와 걱정을 떠안고 살아가지요.


현대사회는 어쩌면 맹수보다 더 지독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그대로 사회에서 낙오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더욱 강하게 우리를 압박해오지 않습니까. 이 가운데서 나의 중심을 단단히 잡고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요? 거창하게 질문해놓고 그럴듯한 답을 돌려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방법은 이렇듯 뻔한 수단이 최선이라고 여겨집니다. 흔들리더라도 스스로가 믿는 길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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