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늘한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희 Oct 22. 2019

물건이 쓰레기가 되는 순간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년 10월 22일 화요일, 89번째

고장 난 의자

쓰고 있던 의자가 기어코 고장이 났습니다. 2주 전에는 왼쪽 팔걸이가 박살이 나더니,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며칠 전부터는 앉았을 때 미묘하게 틀어진 느낌이 들었지요. 이만큼 전조를 보내왔으니, 내심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어제 바로 고장이 날 줄이야.


이렇게 급작스러울 줄은 몰랐죠. 의자를 어떻게 써왔는지 곰곰이 기억을 돌이켜봤습니다. 어제까지 버텨준 게 용할 지경이더군요. 잠잘 때를 제외하고 침대에 누워있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키려 집에 있을 때면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있었으니. 하물며 등받이를 최대한 기울여놔서 눕다시피 해서 부하가 더 심했겠죠.


제아무리 튼튼해도 물건인 이상 부러지는 거야 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고장이 나버리는 건 좀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험하게 썼나 싶어서 자성의 시간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간 돈에 비해 제값을 하지 못했다는 기분만 듭니다.


물건-쓰레기의 묘한 상관관계

이제 '의자'는 불과 하루 전까지는 '의자'였을지 몰라도, 꼼짝없이 '폐품'이 되었습니다. 고장 여부로 물건을 바라보는 관점마저 180도 바뀌어버리니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역할을 상실하는 순간 과거에 어떤 의미가 있었건 길거리에 나뒹구는 먼지나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지지요.


제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쓰레기가 달리 쓰레기인가요. 더 이상 '버리는 것' 외에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으니 쓰레기지요. 새하얀 휴지도 코를 풀거나, 무언가 닦아내는 등 사용되는 순간 휴지라는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책상 위가 아니라 당장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문득 글을 쓰는 이 순간, 번뜩하고 의구심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다 쓴 휴지'는 정말 쓰레기일까요? 그럼요, 가타부타 말할 것도 없이 '쓰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쓰레기'라고 말하기 때문에 쓰레기라고 여겨지는 게 아닐까요? 말장난 같다고요? 그럼 조금 더 사유를 이어 나가 보겠습니다.



무엇이 쓰레기를 만드는가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먼저 쓰레기의 사전적 의미부터 들여다보겠습니다. 이럴 때 사전만큼 좋은 기준이 되어주는 게 또 없거든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쓰레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1. 비로 쓸어 낸 먼지나 티끌, 또는 못 쓰게 되어 내다 버릴 물건, 내다 버린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비속어로 사용되는 또 다른 용례에 대해서는 구태여 첨부하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쓰레기'는 못 쓰게 되어 내다 버릴 예정이거나, 이미 버린 물건을 총칭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버린 것일까요? 답이 나와있지요. 못 쓰게 되었으니까! 왜 못 쓸까요? '버리는 사람'이 '못 쓴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죠.


그러면 결국 쓰레기는 그것 스스로가 '쓰레기'가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쓰레기라고 정의되었을 뿐인 게 아닐까요? '쓰레기'를 '쓰레기'라 칭했기 때문에 '쓰레기'가 되었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쓰레기'는 사용자가 그리 정의했을 뿐, 처음부터 '쓰레기'는 없으니까요.


너무나도 인간적인 우리.

나훈아 씨의 노래 중에도 비슷한 깨달음을 주는 가사가 있습니다. <잡초>라는 노래입니다. 아마 노래보다 유명한 대목일 텐데, '이름 없는 잡초야'라는 부분입니다. 잡초라 불린 풀의 입장에서는 황당하지 않을까요. 인간의 관심에서 벗어났다고 대뜸 잡초라니. 물론 노래에서 의도했던 바는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겠지만.


아니, 애초에 황당하다 여기는 것도 웃긴 일이군요. 풀은 그저 풀일 뿐, 인간에게 어떻게 불리든 딱히 관심도 없을 겁니다. 관심이 있을 거라거나, 혹은 황당하다는 인식조차 '인간적'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인간적'입니다. 인간이 인간적인 게 무슨 잘못이겠냐마는, 그 밖의 관점은 고려하지 못한다는 거죠.


인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쓸모의 유무로 잡초와 잡초 아닌 것이 나뉘고 쓰레기인 것과 쓰레기가 아닌 것이 나뉩니다. 인간인 이상 부지불식간에 빠지고 마는 인식의 함정입니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도 이를 두고 '종족의 우상'이라 칭했지요. 모든 것을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또한 문제이니까요.

 

삶의 문제로 돌아와서.

그렇다고 오늘부터 쓰레기를 쓰레기로 부르지 말자거나, 지금까지의 쓸모와 노고를 긍휼히 여겨서 버리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만 해도 의자가 공간을 차지하는 게 못마땅해서 오늘 아침에 당장 동사무소를 찾아가 폐기물 스티커를 떼왔는 걸요. 쓰레기를 쌓아두고 살 수는 없으니 버리긴 해야지 않겠습니까.


'쓸모'의 유무나 그와 같은 여타의 조건을 두고 무언가 판단하는 일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한 번쯤은 고민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물건이나 사건, 상황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실제로 그런 과정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이 마냥 옳을까요?


모든 판단을 부정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겠지만, 판단한 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겠죠. 고작해야 쓰레기 버리는 일에 이런 고상한 측면을 갖다붙이는 건 너무 과했나 싶기도 하군요(웃음). 일기를 대신한 오늘 하루의 기록이라 여겨주시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돈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