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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Dec 11. 2019

소원, 그 역설에 대하여

{오늘 하루 한 편의 짧은 글] 소원

소원하면 김구 선생의 일화가 떠오른다. 혹은 소원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루어주는 원숭이 손이라든가. 마법의 램프 등등. 소원에 대한 일화는 소원이 지닌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으므로, 결국 소원은 이를 바라는 이가 얼마나 간절한지 드러내는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하다는 점과, 두 번째는 정작 소원이 이루어져도 당사자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원은 이루어져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소원을 바라는 상황이 영원토록 유지되어도 곤란하다는 참말이지 기묘한, 역설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그런가, 소원을 좀체 떠올려본 적이 없다. 지원금을 받으려면 소원에 대한 글을 기깔나게 써야 할텐데 벌써부터 문장이 막혀버린 탓에 엄한 소리로 글을 시작한 이유다.


어디 소원을 빌어볼 일이 있어야 소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이라도 해봤을텐데, 막상 이벤트랍시고 뭐라도 써서 올리려니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등 개인적인 부류나 내친 김에 아예 세계평화를 이루고 달라는 터무니 없는 종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문제는 1등을 해도 200만원으로는 부자가 되는 일과 세계 평화는 요원하다는 거겠지. 아, 잠깐 정도 행복해질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두고 보면, 어렸을 때도 그다지 소원을 빌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진심을 다해 무언가 바라더라도 이루어질 거라는 기대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게, '진심을 다한다'는 말조차도 애매모호하고 바라면 이루어진다니, 세상에 그럴 리가 있남. 나이를 떠나서 어느 정도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면 소원을 빌 리가 없을 테지. 이루어질 리 없으니 말이다.


결국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소원이고, 어쩌면 바람으로 머무를 때에야 아름다운 지도 모른다.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목표를 이루거나, 소원이 이루어진 이들이 불행했던 것을 보라. 그들은 '바람'의 상태에 놓여있는 편이 차라리 나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소원과 목표 그 자체가 아니라 이후의 삶이다.


인간의 삶은 결과가 아니라 끝없는 과정이어서, 소원이나 목표 하나가 이루어졌다고 덜컥 완성되지 않는다.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엇도 확실하게 어떻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나. 성공을 좇아 살았으나 돌아보니 불행한 삶이었다거나. 그렇기에 소원을 무엇이라고 말하자니 어려운 노릇이다. 핀잔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그래도 소원 한 줄이라도 적어 놓는 게 예의인가 싶어 부랴부랴 떠올려본다.


적어도 2020년에는 워라밸이 괜찮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나참, 취업이 소원이라니 적어놓고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오지만 이만한 것말고는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다. 글쎄, 그 이유라면 나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크게 불만이 없고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 전부 의탁해야하는 이 상황만이 유일한 불안 거리이니 이를 해결하려면 취업을 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 문득 떠오른 진짜 바라는 것 하나. 취업을 하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나를 돌봐주시느라 고생하신 고모님. 고모님과 국내든 해외든 짧게 여행을 다녀오면 좋을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고모님께 끝내주게 맛있는 식사라도. 식사 정도야 취업을 해서도 할 수 있겠지만, 일주일 정도는 시간을 내서 그분과 지내고 싶다. 그 하루하루 동안 고모님께 금전적으로 부담을 지우지 않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역시, 쓰다보면 뭔가 나오는 법인가 싶기도 하고. 채택되지 않더라도, 내가 직접 할 수는 있겠지. 





※ 네이버 이벤트 참여를 위해 쓴 글을 브런치에도 올려봅니다. 브런치에 쓴 글도 죄다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하는데 이것도 못할 게 뭔가 싶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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