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와 함께 거리를 걷던 중이었다. 평소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여자친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저기 크로플을 파는 곳이 생겼네!"라고 말해왔다. 크로플? 여자친구의 입에서 생전 처음 듣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나는 '크로플'의 정체가 무엇인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여자친구는 곧장 나를 쓸데없는 고민에서 끄집어냈다. '크로플'이라는 건 '와플 메이커에 밀가루 반죽 대신 크로와상 생지를 이용해 만든 디저트'라는 모양이다. '크로와상'과 '와플'에서 이름을 따와 '크로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데, 실로 명쾌한 작명이다. 하지만 여자친구에겐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 명칭이었나 보다.
크로와상(좌) 와플(우), 출처 - 위키피디아(출처 문제로 크로플 이미지는 구하질 못했다.)
여자친구의 주장은 이러했다. 크로플은 크로와상 생지를 이용했으니 크로와상인 셈이고, 와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자친구의 단호한 주장에 내 안의 승부욕(?)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크로플이 크로와상이냐 아니냐를 따져서 싶었다기보다는 여자친구가 이렇게나 단호하게 말하는 이유가 정말 궁금했다.
와플인가 크로와상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예송논쟁 마냥, 크로플이 크로와상인지 와플인지를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나는 와플 메이커를 이용했다면 재료가 어찌 되었든 와플이 아니냐며 크로와상 생지를 썼다고 해도 크로플은 와플이라 보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의견을 냈다.
여자친구는 좀체 납득하기 어려웠는지, 내가 쉽게 답변하지 못할 반례를 꺼내 들었다. 그럼 와플메이커에 밥을 넣고 구워내면, 그것도 와플이냐는 것이었다. 그 반론을 듣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밥이 재료라면 그건 와플이라기보다는 밥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스스로 납득하고 만 것이었다.
구글에 밥와플을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 어떻게 봐도 '밥'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와플메이커에 밥을 넣어서 만든 음식을 밥이라면, 크로와상 생지를 써서 만든 디저트도 크로와상일 것이다. 논리적으로 타당한지는 제쳐두고서라도, 나는 이미 이 주장에 설득이 되고 말았다. 할말이 궁색해진 나머지 나는 이 반례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사례를 들어서 방어하기로 결심했다.
사물의 본질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반론은 다음과 같았다. 크로와상 생지를 이용했다고 해서 크로플을 크로와상이라고 한다면, 인체를 구성하는 물질을 단 1g의 오차도 없이 고스란히 가져오면 그 물질의 합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이제와 고백하건데, 제대로 된 반론은 결코 아니었다.
제대로 반론을 하려고 했다면, 우선 밥 와플을 와플로 볼 수 있는지부터 답해야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밥을 이용했다면 밥에 가깝지 와플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그 순간에 여자친구는 나의 논점 흐리기를 지적하기보단, 그럴싸한 지적이라며 적절한 대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곤경은 넘겼으나, 나 또한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사물의 본질을 정의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할까?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일까 아니면 사물이 되기까지의 과정일까? 다른 대상과 구별되는 특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갑작스레 철학의 필요를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철학이 필요한 순간
사실 이렇게까지 갈 이야기도 아니긴 하다. 크로플은 크로플이라 부르기로 했으니 크로플이 되었을 뿐이니. 하지만 크로플을 와플이라고 볼 것인지 크로와상으로 볼 것인지를 따지기 시작하면, 좀 더 근원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크로플을 크로플이게 하는 본질은 무엇일까. 혹은 와플이나 크로와상으로 볼 수 있을까? 철학에서는 이미 숱한 논쟁을 거쳐왔을 주제를, 이제사 맨바닥에서부터 시작하려니 만만치 않다. 어떻게 이 엄청난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살아왔을까?
먹고사는 데에는 철학이 하등 쓸모가 없다지만, 삶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도 모르게 철학에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맛나게 크로플을 먹으면 되지 따지고들 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결국 여자친구와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나중에 크로플을 먹고 결론을 내자며 경험에 맡기기로 했다.
크로플은 크로플...?
참으로 맥 빠지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나는 여전히 크로플을 크루아상과 와플, 둘 중 무엇이라고 해야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채 의구심만 가지고 있다. 잠정적으로'크로플은 크로플'이라고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여자친구와 실컷 크로플 이야기를 한 다음날 크로플을 먹고 내린 결론이다.
여자친구는 여전히 크로플은 크로와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그 주장에 반론을 펼치고 싶지만, 제대로 된 와플을 먹어본 적도 없으므로(!) 크로플을 두고 와플이니 크로와상이니 하기 전에 일단 와플을 먹어보는 게 우선일 것 같다. 여자친구는 다음 번에는 와플을 먹자고 이야기했다.
과연 와플을 먹고 나면 나는 '크로플'을 정의내릴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뭐라고 하든 크로플은 크로플이겠지만, 와플이냐 크로와상이냐를 시원하게 답을 내지 못한다면 이 찝찝한 기분은 크로플을 볼 때마다 남아있을 것 같다. 이런, 하도 크로플 크로플 거렸더니 크로플이 뭔지 모를 지경이다.
끝으로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들이 몇 가지 있다. 밥와플도 버젓이 와플이라고 부르는 걸 봐서는 이걸 처음 만든 사람들도 와플 메이커를 썼으니 '와플'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심지어 크로아상도 비슷한 혼종이 있는데, 크루아상으로 머핀을 만들어놓은 '크러핀'이 그것이다.
이건 크루아상 생지를 썼지만, '머핀'이라서 크러핀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크로넛도 있다고 한다. 눈치 빠른 분들이라면 무슨 의미인지 아실 것이다. 이놈은 크루아상 생지로 만든 도넛이다. 그래, 세상에는 크로넛도 있고 크러핀도 있는데 크로플이 있는 게 뭐가 이상한가.
농담으로 시작한 이야기였으나, 막상 논의가 진전될수록 미궁에 빠진 기분이다. 크로플을 어떻게 정의하는 게 좋을까. 부르기 나름인가? 그것도 아마 대답이 될 수는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