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한편] 메뉴 정하기
흔히들 직장생활을 두고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표현하죠. 이 한마디 말에는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뜻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판단과, 돈을 벌기 위해서 이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 그러므로 더러워도 내가 참는다는 결론까지.
감정의 결은 또 얼마나 복잡다단합니까. 업무의 지난함과 그로 인한 환멸, 혹은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껴지는 무료함, 자신 앞에 놓인 상황에 대한 부당함, 무력감 등등. 예전에는 몰랐지만 '먹고사는 일'이란 이토록 만만치 않은 일이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어려운 '먹고사는 문제'가 있습니다. '먹는 일' 그 자체입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건 모든 직장인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난제일 겁니다. 하물며 구내식당이 있다고 하더라도, 먹는 일이 선사하는 어려움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게 맛이 없으면 힘이 안 나잖아요.
그래서 맛있는 점심식사를 고른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직장인만 그런 게 아닙니다. 학생도, 주부도, 심지어는 백수에게조차 '점심메뉴 고르기'는 신중한 판단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 순간만 떼어놓고 본다면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죠.
많은 이들이 무엇을 먹야하는지를 앞두면 서로에게 메뉴를 정하라며 미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중요한 문제라서 오히려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겁니다. 차라리 누군가 대신 선택해주기만을 바라는 절박한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끝끝내 평소에 먹던 걸 계속 먹거나 하는 식으로 귀결되고 말죠.
저만해도 그렇습니다. 회사 근처에 식당이 그리 많지 않아서, 선택지가 제한적이기도 하지만 매번 다른 걸 먹는다는 게 오죽 귀찮습니까. 월요일에는 이 집, 화요일에는 저 집, 수요일에는 그 집. 로테이션을 돌리게 되더라고요. 매번 점심 메뉴를 사진에 남기는데, 가만히 보면 일주일 단위로 똑같은 걸 찍고 있더군요.
요즘엔 재택을 하게 되서, 좀 색다른 걸 먹나 했지만 여전히 '먹는일'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재택의 가장 큰 장점은 출근을 위해 집밖을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건데, 역설적이게도 가장 큰 단점 역시 집밖으로 나가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특히나 겨울이라서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날씨가 좀 괜찮을 때는 배달을 시켰지만, 이것도 한 두번이지 요새는 눈이 얼마나 많이 왔나요. 배달하는 분들에게 미안해서 배달하기도 그렇고, 아예 앱 차원에서 배달 자체를 받지 않더군요. 공익 차원에서 적절한 조치였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여하튼 먹는 걸 해결해야하는 입장에선 선택지가 줄어든 셈입니다.
먹어야 힘이 나니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와 끼니를 떼우거나, 아니면 집에 남아있던 음식 비슷한 것들로 허기만 채우는 식이었습니다. 그것도 몇 번 정도 반복했더니 이제는 집에 먹을 것도 없고, 배달도 안 되고, 편의점 도시락도 물렸습니다. 큰 결심을 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죠.
먹고사는일이 어쩌네 거창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오늘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점심메뉴가 맛있었거든요. 집에서 한 5분쯤 거리에 있는 식당이었습니다. 원래 집근처에 있던 식당에서 카레를 먹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인지 전화주문제로 운영 중이라 저로서는 상당히 멀리 나오게 된 셈이었습니다.
든든한 걸 먹고 싶어서 백반을 파는 곳이 보이길래 냅다 들어갔는데, 오징어볶음 사진을 봤더니 군침이 당기더군요. 망설이지 않고 시켰습니다. 매우 만족스러웠죠. 밥을 두 공기나 비웠습니다. 평소에도 점심식사를 확실하게 챙기는 편인데, 오징어볶음이랑 먹으니 밥이 술술 들어갔습니다.
오징어볶음을 먹는 중에도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대체 뭐길래, 나는 매일매일 점심메뉴 하나에 이렇게까지 기뻐하느냐는 성찰에서부터 오징어볶음이 정말 맛있어서 밖에 나온 보람이 있다는 만족감과 학교 다닐 때는 대체 어떻게 식사를 해결했더라하는 궁금증까지.
대학교를 다닐 때도 매번 학생식당을 가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생식당의 식사가 맛있어서, 매번 밥 먹는 재미가 쏠쏠했지요. 덕분에 전역하고서도 혼자 강의를 들으러 다니면서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역시 먹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 잘 먹어야 잘 살 수 있으니까요. 직장인이 되서도 여전히 먹는 일은 중요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내일 저심은 또 뭘 먹나 벌써부터 고민이 되지만 이 엄청난 고민은 내일의 나에게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여러분도 잘 먹고 잘 사시기를. 이 힘든 시기에 모두가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