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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Jun 10. 2019

사람에게도 나이테가 있다면.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년 6월 10일, 53번째 글


여러분은 글씨를 잘 쓰십니까? 명필?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법 깔끔한 편? 혹시 본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악필? 명필이냐 악필이냐 하는 이분법으로는 고유한 개성을 지닌 필체를 나누는 게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고 보면 글씨만큼 사람의 개성을 잘 드러내는 것도 몇 없습니다. 이것도 옛말인가요? 요즘은 손으로 쓸 일이 잘 없긴 하네요. 어지간한 문서 작업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처리하는 게 일상이니. 펜을 쥐는 일 자체가 드물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듣거나 아니면, 서명을 할 때 정도? 필기도구가 필요한 순간이 잘 떠오르지는 않는군요. 하여간 누군가 써놓은 글씨를 봤을 때, 직접 마주한 것도 아닌데 이미지가 연상되는 신비한 감각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100%까지는 아니지만 상상했던 이미지와 꽤 가깝지요.


저는 악필은 아니라고 자부합니다만, 그렇다고 잘 쓰는 편도 아니고 굉장히 개성 있는(?) 글씨입니다. 일단 그렇다고 해두겠습니다. 나름대로 교정을 해보겠다고 글씨 교정 교본을 사서 따라 써보기도 했는데 효과가 애매하더군요. 글을 쓸 때 묘한 습관 몇 가지가 생겼다 뿐이지, 필적 자체는 그대로더군요. 이것도 참 사람의 성격하고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바꾸려고 해도 본질 자체가 바뀌지는 않고, 세부적인 특징 몇 가지만 살짝 바뀌니까요. 요즘도 교재 하나를 사서 따라 쓰고 있는데 하루 걸러 하루, 아니면 삼일에 한 번, 10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만 하다 보니 아직 효과를 보진 못했습니다. 한 달 정도면 얼추 티가 나긴 하겠죠. 굳이 바꿔야 할 필요는 없지만, 한 번 멋들어진 글씨를 써보고 싶기도 하거든요.

1년 전에 샀었나... 묵혀두고만 있다가 뭐라도 하자 싶어 짬짬이 하고 있습니다.


글씨로 오해를 받았던 경험도 있었습니다. 때는 중학교, 과학 시간이었을 겁니다. 그동안 배운 걸 확인하는 겸 쪽지 시험을 치게 되었습니다. 객관식-주관식이 섞여있었는데, 보기에 설명된 특징에 부합하는 암석의 명칭을 적어야 하는 주관식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 정답이 현무암이었나 그랬을 겁니다. 저는 정답을 적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채점이 끝나고 보니 틀렸다고 되어있지 뭡니까. 채점 맡았던 옆자리 학우에게 물어봤더니, 자기 눈에는 현무가 아니라 현수암으로 보였다는 겁니다. 


그럴 리가 있나! 제 눈에는 어떻게 봐도 현무암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데, 현수암이라니요. 그런데 듣고 보니 현수암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거기서 납득하면 오답 처리가 되니까 안 될 일이죠. 저는 계속 항의했습니다. 똑똑히 봐라, 분명히 'ㅁ(미음)'이 아니냐. 내가 미쳤다고 현수암이라 썼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학우는 그게 어떻게 'ㅁ(미음)'이냐고, 우길 걸 우기라고. 자기 눈에는 'ㅅ(시옷)'으로 보인다며 틀려놓고 우기지 말라더군요. 선생님에게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정작 선생님도 판별이 어려우셨는지 결국 오답처리가 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답을 적고도 틀려야 해서 얼마나 억울했는지.


물론 그러고도 글씨를 고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의 저는 잘못한 게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므로(...). 그러고 별 고민 없이 지내다가 군대에서 할 일도 없겠다, 글씨나 교정해보자 싶어 교재를 사서 하루하루 분량을 정해놓고 해나갔지요. 군 복무가 얼마나 남았나 새는 용도로도 쏠쏠했습니다. 그렇게 두어 달 쓰고 나니, 바뀌기는 했는데 엄청나게 알아 볼 정도는 아니고, 어딘가 각이 좀 졌다는 느낌이 생긴 정도 였습니다. 이제는 뭐라고 썼는지 남들이 봐도 알아볼 수는 있겠다 싶은 수준이 되었죠. 급하게 쓰면 여전히 글씨가 날아가긴 합니다만.


대학교까지 졸업했으니 이제 글씨를 쓸 일도 딱히 없지만 교정 교재를 사놓고 또 따라 쓰고 있습니다. 뭐, 언젠가 쓸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한 자 한 자 따라 쓰다 보면 마음 정리가 될 때도 있고. 뭔가 글씨가 나의 얼굴이라 생각하면 가꿔봐야겠다 싶기도 하고. 여하간 성별이나 나이, 배경에 따라서도 글씨가 바뀌는 걸 보면 글씨가 그 사람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니겠죠. 그렇다고 글씨가 예쁘다고 사람의 본질이 올바르다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글씨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꽤나 긍정적일 겁니다. 


나만 알아보면 그만이긴 합니다. 이러고 보면 마치 외모 같기도 하군요. 구태여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나라도 스스로의 매력을 인정하고 있다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겠죠. 그러나 남들에게 보여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가치를 봐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한 부탁이곘죠. 결국 언젠가는 달라지긴 해야 할 겁니다. 너무 거창하게 떠들어댔군요. 그래봐야 한낱 글씨일 뿐입니다. 그저 오늘 하루도 마무리해가는 시점에서 글씨 교정 북을 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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