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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Oct 31. 2017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이갈리아의 딸들』

가위로 고추를 자르며

이것은 친구의 카톡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몇 해 전, 한 남성이 고려대 정문 앞에서 가위로 고추를 자르며 1인 시위 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선글라스를 낀 남성은 음악까지 틀어놓고 신명나게 고추를 잘랐습니다. 그 영상을 친구에게도 알려줬었는데 친구가 얼마 전,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그때 그 영상 뭐였지?”

신기하게도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고추를 자르던 남성 옆에 놓인 팻말은 “이런 Dr. 반댈세! 총장님? ‘출교’조치 원해요”였습니다. 이제 저처럼 새록새록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고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 이야기입니다.

2011년 5월, 가해자들은 피해자와 가평으로 놀러갔다 술에 취한 피해자를 성추행하고, 휴대전화로 촬영했습니다. 앞서 말한 고추 자르는 1인 시위와 여론 악화 등 시민사회의 압박이 높아짐에 따라 학교는 결국 가해자들을 최고 수위의 징계인 ‘출교’ 조치했고, 법원 역시 가해자들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습니다.(하지만 다시, 가해자들이 다른 학교 의대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기사링크)


소름이 끼칩니다

이런 사건 목록은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조선대 의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남성이 여자친구를 감금, 폭행한 사건(피해 여성은 폭행 당시를 녹음했는데 사실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가해자는 난폭했습니다.), 고교생 22명이 중학생 2명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기사링크), 신안 섬마을에서 주민들이 파견 온 교사를 성폭행한 사건(기사링크)... 소름이 끼칩니다.

그뿐인가요. 여성 비하 발언을 하거나 성추문이 있었거나 아내를 폭행해 사회적으로 뭇매를 맞았던 남성 연예인들은 당분간을 견디고는 버젓이 TV에 얼굴을 내밉니다. 드라마에서는 여성의 손목을 강제로 잡고 끌고 가는, 여성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는, 완강히 거부하는 여성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는 장면들이 여전히 로맨틱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2015년, 월간지 <맥심>은 테이프로 발목 묶인 여성의 다리가 트렁크 밖에 나와 있는 표지를 실었다가 결국 해당 호를 전량 회수했지만 의심스러운 행보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몰카 범죄의 온상으로 꼽혔던 국내 최대 성인 음란 사이트 ‘소라넷’은 폐쇄되었지만 ‘제2의 소라넷’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지요. 그리고 지금 폭로되고 있는 성폭력 사건들.    

두렵습니다. 여성에 대한 인권 침해가 있다고, 피해자를 보호하라고, 가해자 처벌 수위가 낮다고 반복해서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고 있지만 글쎄요. 두려워하는 여성들을 안심시킬만 한 대책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회가 여성을 둘러싸고 모종의 공모를 하고 있다 느낀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욕을 억제할 수 없다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습니다. “장애인이나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때와는 다르게, 자기 권리를 외치는 여성을 사회가 얼마나 싫어하는지”(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47쪽) 여성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선언 씩이나 해야 합니다.

2016년 한 해, 남편이나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82명,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105명, 친구나 부모 등 주변인이 중상을 입거나 살해당한 경우도 최소 51명(한국여성의전화 발표)이었습니다. 데이트폭력 발생 연령층 또한 점점 낮아지고 있지요. 이런 명백한 사실들이 이곳이 결코 여성을 위한 나라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회는 줄곧 “모든 부분에서 여성보다 이성적·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이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는 성욕을 억제할 수 없다.’며 스스로를 ‘동물’의 수준에 놓”(정희진, 같은 책, 52쪽)는 것에 기꺼이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고,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습니다.


‘다른 목소리’가 더 많이 자신을 말하고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의 세계는 이런 세상을 전복합니다. 출산의 ‘권력자’ 여성이 지배하는 사회, 남성이 자신의 ‘흉한’ 성기를 가리는 페호(peho, 남성이 페니스를 받치기 위해 입는 옷)를 착용하는 곳,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고, 남성은 정기적으로 피임약을 복용해야 하는 곳. ‘이갈리아’의 세계는 탁월하고 완벽한 이 세계의 ‘미러링’입니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길. 당연히 『이갈리아의 딸들』은 통쾌하지만 저는 그 세계를 꿈꾼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성이 남성을 강간하고, ‘소수자’인 남성이 남성해방운동을 해야 하는 곳이 뭐 그리 아름답겠습니까. 이곳의 약자가 저곳의 강자가 되는 것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을 겁니다. 다만, 그럼에도 이 소설에 집중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언젠가, 먼 훗날에 ‘여성을 위한 나라’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곳은 정희진의 말처럼 ‘다른 목소리’가 더 많이 자신을 말하고, 그 목소리에 사회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는 곳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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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22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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