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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Nov 03. 2017

엄마라는 중년 여성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1.

엄마에 대해 써야 합니다.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남동생들을 업어 키웠던, 그래서 부모가 학교에 보내주지 않자 제 발로 학교를 찾아가 사정해 수업을 듣던, 악필을 놀리는 딸에게 버럭 화를 냈던, 누구보다 욕망이 크던, 그래서 결핍도 컸던 엄마에 대해서 말입니다. 일을 하고 들어와서 밥을 차리고 집안 청소를 하는 그 엄마를.


엄마는 ‘딸이라서’ 겪는 차별이 지긋지긋해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저학력의, 가난한 여성이던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지요. 엄마는 친척집에 머물며 집안일을 하고 사촌 조카들을 키웠습니다. 그에게 여성의 ‘성 역할’이란 생존 방법이었습니다. 결혼은 엄마의 가사와 육아 노동이 친척집에서 자신의 가정으로 옮겨간 일이었는데 그러면서도 남편의 벌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인형 눈알 박기, 인조 손톱 다듬기, 새벽 건물 청소하기 등의 ‘부업’을 해 살림에 보탰습니다. IMF 때는 여느 집처럼 남편의 실업을 겪었지만 엄마는 남자의 ‘기’를 죽이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엄마의 경제 활동은 더 다양해졌습니다. 칼국수 집에서 어깨가 빠지도록 밀가루 반죽을 밀었습니다. 엄마의 돈벌이는 가정 경제에 점점 더 중요한 의미가 됐지만 언제나 부업 또는 아르바이트라고 불렀습니다.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아빠의 경제 활동이 출근과 퇴근 같은 표현으로 설명된 것을 생각하면 억울한 일이지만 엄마에게 우호적인 전환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일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엄마가 빨아주는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남성의 위기’(한국에서는 ‘고개 숙인 아버지’로 대표되는) 담론이 언론의 사회면을 장악한다. 하지만 경제 위기 때 즉각적인 타격을 받는 건 언제나 여성이다.(『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권김현영,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 72쪽)


엄마는 그 사실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삶은 억울했겠지요. 그는 남동생에게도 설거지를 시켰습니다. 제게 줄곧 결혼은 늦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할 줄 알면 해야 한다’는 삶의 깨달음 때문에 저에게 요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빠에게도 아침밥 정도는 알아서 해결하라고 선언했습니다. 아빠는 그렇게 했습니다. 엄마가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게 된 이후의 일입니다.


2.

그러니까 다시 엄마에 대해 써야 합니다.

아빠-남동생-나 순으로 밥을 푸던, 동네잔치에서 일손 돕지 않는 여자들을(술 마시고 놀 뿐인 남자들이 아니라) 욕하는 엄마에 대해서. 딸이 시어른들에게 더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 미혼의 아들이 어서 여자를 만나야 안심이 되겠다는 그 엄마를 꼭 써야 합니다.

평생 ‘여자니까’라는 말로 딸을 대한 적 없던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하자마자 여자로서의 역할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가에 제사가 있다고 하니 직장에 휴가를 내고라도 일찍 가라고 했습니다. 명절이면 집에 빨리 올 생각 말고 시어머니가 보내줄 때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저는 고집불통에다 엄마 말은 통 안 듣는 딸이라서 그런 말은 신경도 안 썼습니다. 당연합니다. 그가 자신의 딸을 그렇게 키웠습니다. 오히려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입바른 소리로 대거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외롭고 서러웠습니다. 책에서 읽은 것들을 최대한 설명하려 애쓰고, 실패했습니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가치가 아버지, 남편, 애인 등 남성과의 관계에 의해 정해진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남성만이 인간이고 여성은 남성의 소유, 부속, 기호가 된다.(『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정희진,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37쪽)


당연하게도, 이런 말은 끝내 엄마에게 가닿지 않습니다. 이 전투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아직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게 엄마의 말, 그 태도가 그런 세상의 도래를 지연시키고 있다는 게 저의 말입니다. 엄마는 자신을 탓하는 저의 말을 들을 때면 가부장제와 투쟁해온 자신의 삶이 떠올라 기가 차고, 저는 여전히 그 족쇄 안으로 딸을 끌어들이려는 엄마를 점점 더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화해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갈수록 이 질문이 커져만 갑니다. 세상의 성차별에 분노할수록, 페미니즘을 공부할수록 의문은 깊어집니다. 엄마라는 중년 여성과 나는 과연 화해할 수 있을까.

 

3.

아마 우리는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각자의 삶에서 투쟁하고, 상처입고 있지만 승리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이것은 괴로운 일이고, 괴로워서 때론 이런 싸움이 없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그때의 평화가, 다정함이 그리워서 가끔은 그 시절이야말로 좋았던 때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입니다. 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엄마가 여성으로서 겪어낸 삶을, 제가 여성으로서 겪어낸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마의 오류와 나의 오류를 모두 포함한 우리의 오류가 우리를 다음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싸우지 않는 상태가 평화는 아니라는 말을 떠올리고, 그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여자로 태어나서 다행이다. 아빠는, 남동생은, 남편은 모를 삶의 투쟁을,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이 투쟁을 언제까지고 계속 하고 싶다. 평행선 위에서,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끝까지 살아내고 싶다. 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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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66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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