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 Sep 29. 2022

곰돌씨의 이 밤

관악살이에 힘이 되어준 물건에 관하여


쌔액 쌔액, 휘유우ㅡ,


아, 곰돌씨가 기다리던 신호입니다! 까끌거리는 눈을 몇 차례 끔뻑이는 것으로 이 밤의 곰돌씨의 임무는 시작됩니다. 곰돌씨의 시선 속 아이는 간밤보다 한 뼘 더 자라있습니다. 여느 밤처럼 어둑한 공기와 달빛이 영창을 희미하게 엿보고, 아이가 내뿜는 호흡으로 달콤하게 축축해진 새벽녘입니다. 이 밤은 또 어떤 과거와 무의식이 아이를 잠식시킬까요? 곰돌씨는 뿌듯하게도 무거운 어깨를 하고 진득하니 아이의 머리맡을 지킵니다.


타닥타닥, 화르륵.

이 밤의 첫 번째 객은 도깨비불인 모양입니다. 도깨비불은 장난기가 심하고 기분에 따라 고약해질 수 있으므로 빠르게 내쫓지 않으면 아이의 밤은 내내 뜨거울 것입니다. 곰돌씨는 서둘러 지난 밤들에 방울방울 모아두었던 아이의 눈물창고를 엽니다. 도깨비불은 인간의 사소한 고통을 즐거이 여기는 심보가 있기에 이 눈물방울들은 그를 잘 달래 돌려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도깨비불은 방울방울을 음미하며, 킬킬대며 아이를 스쳐갑니다. 이 밤의 악몽은 무사히 면했습니다.


째깍째깍.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이 밤의 두 번째 객은 이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일 무렵 횡단보도에서 스친 한 남자입니다. 이 남자에 대한 정보가 없는 곰돌씨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행복 회로 한 줄기를 꺼내 검을 만들어 쥐었습니다. “잠깐 거기 멈춰!” 곰돌씨는 저벅저벅 망설임 없이 걸어오는 그 자를 향해 검을 뽑아 듭니다. 그러자 그 자는 온화하게 웃는 얼굴과 아주 살짝 볼 멘 목소리로 답합니다. 오늘 낮에 이 아이가 길을 건너다 십 수년 전의 자신이 신고 있던 망아지 그림의 장화를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다고. 이 아이의 무의식이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 설명합니다. 곰돌씨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기어이 초대장면을 확인하고 나서야 검을 거두고 길을 터줍니다.


째깍째깍.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납니다. 이건, 이 냄새는…… 한겨울의 동치미 냄새? 아니, 한 여름의 모기장에 배인 수박 냄새…… 한참을 갸웃거리던 곰돌씨는 이내 냄새의 근원을 알아냅니다. 장롱 속 오래된 박하 향이 점점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곰돌씨는 고개를 들어 눅눅하게 상쾌한 향의 주인인 아이의 할머니와 눈을 맞춥니다. 아주 오랜만에 본 아이의 할머니는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곰돌씨는 반가운 마음으로 폴짝 뛰어올라 할머니의 박하 향 속으로 파고듭니다.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곰돌씨의 반가움은 애석하게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할머니의 낡아 버린 눈동자가 슬픔과 홀가분함으로 뒤섞여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나른한 미소를 띠며 곰돌씨를 내려보다 자는 아이의 윗니 하나를 빼갑니다. 곰돌씨가 지키는 인간들의 밤세상에서는 윗사람이 운명하면 아랫사람은 윗니가 빠지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곰돌씨는 인간의 영혼이 직접 나서는 일들에는 무력합니다. 돌아서는 할머니의 굽은 등 뒤로 곰돌씨는 절을 두 번 올리고 돌아와 아이의 심장을 들여다봅니다. 빠져버린 윗니의 허전함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공허해진 마음은 무엇으로 채우면 좋을까요? 그저 아이가 내일 눈을 뜨면 이 공허함에 너무 추워하지 않기를, 눈물창고가 범람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곰돌씨의 이 밤은 여느 밤보다 길 듯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할머니와 곶감 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