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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공부가 공대에서 도움 됐을까?

by 케이

혹시 미술 공부라고 하면, 미술사나 조형과 이론이 떠올려지지 않나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미술 공부는 디자인과에서 다루는 설계력도 포함돼요. 사실 제가 예술대학교에서 키웠던 능력들이 과연 공대에서 사용될 일이 있을까, 처음에는 막연했거든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미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 잘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더라고요. 그 부분을 공유해 보도록 할게요.


1. 매력적인 시각화 능력

혹시 논문을 보신 적이 있다면, 그 안에 있는 그림들 기억하시나요? 그 그림의 정식 명칭은 figure에요. Figure의 역할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순서, 과정 등 여러 내용들을 이해하기 쉽게 도와주는 역할이죠. 얼핏 보면 부수적인 역할 같지만, 생각보다 figure의 역할과 영향력은 매우 커요. 어떤 사진을 넣을지, 어떤 각도, 어떤 느낌의 이미지로 통일감을 줄지 등 연구자들은 figure에 대한 고민도 오래 한답니다. 논문의 첫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이에요.


미대 출신들은 심미성을 잘 다루기 때문에 매력적인 이미지들을 제작/선별하는데 뛰어나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실제로 제가 도쿄공대로 교환학생 갔을 때, 지도 교수님께서 '너는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디자인을 잘하는 것은 뛰어난 능력이며, 사람들에게 너의 연구가 얼마나 재밌고 매력적인지 어필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이다.'라고 하셨어요. 미대 출신들은 시각화를 잘해야 되는 것이 일상이니, 뛰어나다고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했던 능력일 수 있지만 어려운 연구의 개념을 쉽게 표현하고 명시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능력이랍니다. 그리고 연구의 종류에는 full paper뿐만 아니라, DIS pictorial, 학회 Poster(LBW)처럼 비주얼 베이스인 논문들도 있어요.


2. 조형 기반의 연구 (UI, 인터페이스, 인터랙션 등)

컴퓨터도 애플의 디자인 때문에 맥북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기술 그 자체로써도 가치가 있지만), 마음에 드는 모양을 띈다는 것은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연구라는 것은, 특정 사물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 사물이 로봇, 핸드폰 화면, 컴퓨터와 키보드 등 다양한 인터페이스가 될 수 있겠죠. 혹여나 제로 UI 또는 유비쿼터스 공간에 대한 연구라면 시각물이 필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많은 연구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다루곤 하는 것 같아요. 그럴 때는 디자인과에서 배웠던 여러 조형에 대한 개념과 감각들이 도움이 되죠. 또한, 3D 프로그래밍 기술이나 그래픽 툴들을 많이 다룰 줄 아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도움이 되는 능력이에요.


3. 감성, 예술, 교육분야에서의 연구 활동 (인문학적 소양)

흔히 AI는 기계적인 내용만을 다룬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생각엔 전혀 아니랍니다. 제가 연구했던 HCI 연구 분야는 인간에 더 집중을 해요. 결국 기술을 사용하는 사용자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가지고 있는 감성적인 영역을 접근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래서 AI를 어떻게 제작하는지나 AI의 스펙 향상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는 사람에 집중하는 과정의 연속인 거죠.


공대 석사를 다닐 때, 제 주변에는 공대 출신도 많았지만 미대 출신 지인들도 많이 있었어요. 공대에서 연구를 한다고 해서, 미술의 색을 아예 지워버리고 백지에서 공대의 지식을 채우려 하는 것은 효율적이지도 않고, 장점을 지우는 느낌이라 아깝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관점과 시각이 새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그 호기심이 연구에서는 중요하다고 봐요.


예전에 제 고민에 대해 상담해 주셨던 분이 떠올랐어요. 저랑 전혀 모르는 사이었는데도, 제가 콜드 메일을 보냈을 때 정성스러운 장문의 메일로 답을 주셨던 분이셨어요. 그분도 말씀을 석사 들어가기 전부터 새겼던 것 같아요. 이 내용이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분들께 응원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라요.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주춤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기존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테니, 힘내길 바라요.

- 2020년 여름에 받았던 콜드메일의 답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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