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적인 색채와 초현실주의 세계
“나는 성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며 꿈꾼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성서에 매료되었다. 나의 예술에 있어 완성은 성서적 원천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쉬고 명상하며, 성서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화와 사랑, 그 이상의 인류애를 경험하고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마르크 샤갈)
20세기 피카소와 함께 최고의 화가로 불리는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현대 미술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샤갈은 주로 고향의 향수를 회상하는 것, 사랑의 신비, 그리고 성서의 시적 영감을 몽상적인 색채와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그렸다.
마르크 샤갈은 러시아 비테프스크에서 가난한 유태인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페테르부르크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그 재능이 인정되어 장학금을 받았으며, 졸업 후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 스틴, 들로네, 자콤, 그리고 입체파 화가들과 교류한다.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화가로서 입지를 굳힌 샤갈은 약혼녀 벨라 로젠벨트와 결혼을 위하여 러시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해 7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이로 인하여 러시아 국경이 봉쇄되었다.
마르크 샤갈은 자기 고향인 비테프스크 인민 예술분과위원장이 되어 비테프스크 미술학교를 만들 정도로 러시아 혁명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성공한 러시안 혁명은 '새로운 볼셰비키 국가'에 어울리는 사회주의 예술가를 원했다. 형태와 색을 배제한 절대주의 사조의 번성은 샤갈이라는 자유분방한 영혼을 지닌 예술가로 하여금 파리 망명을 결심하게 만든다. 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귀화한 후 삽화를 그리고 서커스를 주제로 판화를 제작하여 환상적이고 신비한 표현을 펼쳐 나갔다.
1931년 팔레스타인의 성지 여행 이후 성서 주제의 작품을 시작한다. ‘나는 그곳에서 성경과 나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였다.’라고 샤갈은 자신의 삶을 뒤흔든 강렬한 경험을 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샤갈은 나치의 탄압을 피하여 미국으로 간다. 거기서 유럽에서 망명한 화가들과 어울리며 초현실주의 작품을 제작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아내 벨라가 갑작스러운 바이러스 감염에 의하여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고 이 충격으로 샤갈은 10개월간 작업을 중단한다. 이후 다시 힘을 내서 아내를 회상하는 작품에 몰두한다. 전쟁이 끝나고 파리에서 방스로 이주하고, 피카소, 마티스와 친교 한다. 여기서 샤갈은 발란틴느 브로도브스키를 만나 다시 활력을 찾고 재혼한다.
1955년부터는 <성서 메시지> 연작을 착수하여 다음 해 완성한다. 성서 메시지 연작에는 하느님의 창조, 아담과 이브, 아벨과 카인, 요셉, 삼손과 들릴라,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탈출한 모세, 다윗과 골리앗, 지혜로운 솔로몬 왕,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등 성경에 나온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그는 교회나 오페라좌를 위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메츠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예루살렘의 유대교회를 위한 스테인드 글라스, 파리 오페라좌 천정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좌를 위한 벽화가 유명하다.
그의 탄생 80주년 기념하는 성서의 메시지를 주제로 한 회고전이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서 열릴 정도로 그는 프랑스 국민들이 사랑하는 예술가였다. 특히 1973년 성서적 메시지를 주제로 한, 국립 샤갈 미술관을 니스에 건립하면서 성서 예술을 담은 미술관이라는 그의 평생의 꿈을 실현했다. 그는 또한 프랑스 정부에서 가장 영예로운 인물에게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생 폴 드 방스에서 사망하여 유태인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