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생각] 47. 그 아이의 재산

by 분더카머


오늘의 문장

아이는 등꽃을 골랐다, 그런데 왜 안 사준 것이냐, 돈이 부족하면 지갑을 통째로 계약금으로 걸면 끝날 일을 너는 아비가 한 말도 자식이 어렵게 내린 선택도 헛수고로 만들어놓고 태평하게 있으니 그 얼마나 천박한 심성이냐, 게다가 등꽃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가치를 정하는 것이냐, 다소 값이 비싸다 해도 그 등꽃을 아이의 마음을 살찌울 거름으로 삼아줘야겠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는 것이냐, 등꽃을 계기로 어느 꽃이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면 그것은 아이의 일생에 마음의 여유가 될 것이고 여자 일생에 눈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만약 더 깊은 인연이 있다면 아이는 등꽃에서 담쟁이덩굴로, 담쟁이덩굴에서 단풍으로, 소나무에서 삼나무로 관심의 싹을 키워나갈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제 그 아이의 재산이 된 셈이다,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나무』, 고다 아야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 집에는 방문 판매를 하는 이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들이 제안하는 것들은 대체로 학습지이거나 책이었다. 한 번은 컴퓨터 비슷한 학습용 단말기와 프로그램을 함께 파는 이가 찾아왔고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내가 한 자리에 모여 저녁까지 심각한 고민을 했다. 자식에게 무언가 해주려는 아빠는 나의 눈치를 계속 보았는데, 정작 나는 우물쭈물 거리며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어떤 건지 모르는데 하겠다고 하기도 그랬거니와 그 비용이 엄청난 고가였기 때문이다. 내가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이 일단 해보기로 결정이 되었다. 할부로 해도 큰 비용이 나가는 걸로 얼핏 기억한다. 비용을 물어봐도 대답을 잘해주지 않았다. 내가 부담을 느낄 거라 생각했던 걸까.


그 기기는 컴퓨터를 사기도 전에 경험한 전자기기여서 기분이 좋았다. 며칠 동안 신나게 붙어서 이리저리 다루며 공부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가 떨어졌고 점점 이용하는 빈도가 줄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단말기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거실 한 구석을 채우고 있는 그 기기를 볼 때면 잘 쓰지 못하는 물건을 들여온 것, 열심히 공부하지 않던 것에 점차 죄책감을 느꼈던 것 같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기분을 나는 그때 처음 느껴본 것 같기도 하다. 기대를 저버린 건 그게 처음은 아니겠지만. 결국 그 계약을 해지하며 단말기를 반납했다. 왜 아직도 그때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어린 내겐 꽤나 충격적인 실패로 각인되었던 걸까.


부모님은 내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신 것 같다. 배우고 싶다는 학원은 모두 다녀봤고, 방 한 구석 책장을 책으로 가득 채워준 것도 다 교육의 일환으로 생각한다. 당시 삼국지 60권이 모두 있는 집은 잘 없었는데, 친구들이 놀러 오면 거들먹거리며 자랑한 기억이 있다. ’우리 집엔 책이 시리즈로 이렇게나 많아. 부럽지?‘ 이런 생각이었을까. 만화부터 상식까지 장르를 망라한 책들에 흠뻑 빠져, 엎드려 책을 읽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그렇게 책에 빠져 유년시절을 통과했다. 책으로 둘러싸인 환경을 만들어준 부모님 덕에 아직도 책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아빠 역시 젊은 시절에 그렇게 책을 끼고 살았다고 했었으니. 부모님께 이어져 온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니겠지만 글을 가까이하고 책을 읽는 습관은 나의 가장 큰 재산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어 매번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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