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생각] 48. 단단함과 유연함

by 분더카머


오늘의 문장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상관없었네. 그렇게 결정한 것은 내가 아니었거든. 내 안의 강한 힘이었어"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힘’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근육의 작용보다 능력이나 역량을 먼저 떠올린다.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건 의지. 힘은 빌릴 수도 있고, 합칠 수도 있는 다양한 뜻을 가진다. ‘힘’에다가 ‘할 수 있는’을 붙여 수식한다면 다음 떠오르는 단어는 용기다.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더라도 시도하고 나아가려는 움직임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하고자 하는 것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것은 내면의 힘이 아닐까. 우리 각자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어떻게 보여주는가는 고민해 볼 문제다.


외부 요인에 의해 변하지 않고 본연의 것을 지켜 나가는 마음의 단단함. 지금 내게 필요한 힘이다. 중심을 잘 지켜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칫 너무 단단하면 부러진다. ‘갈대는 꺾이지 않는다’는 말은 바람에 흔들리지만 부러지지 않는 유연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성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빠 회사에서 일을 했던 적이 있다. (나는 아직도 그에게 직접적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지 못한다) 흔히들 하는 아르바이트, 용돈벌이의 개념이었지만 아빠가 무슨 일을 구체적으로 하는지 두 눈으로 보게 된, 내 삶의 결정적 순간으로 꼽는다. 두 눈으로 본 것뿐 아니라 고된 중공업 노동을 체험하고는 가장이라는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몸소 이해하게 되었다. 씻을 힘도 없어 옷만 벗고 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억누르고 있었던 그에 대한 원망은 그렇게 눈 녹듯 사라졌다.


하루는 아빠의 사무실을 보러 가게 되었다. 군대 내무반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락커가 줄지어 있었고 그 중 하나에 본인의 이름과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뭘 이런 걸 다 붙여 놓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보고 넘어갔던 그 문장은 나이가 들어가며 자주 내게 떠 올랐다. 팀장이었던 그의 직책과 그가 해야 했던 역할을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팀이라는 톱니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쓰린 소주를 때려 붓다시피 했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술로 곤죽이 되어 돌아왔다. 누에처럼 겉옷을 달랑 벗어놓고 지쳐 쓰러져 자던 그의 젊은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 아빠 나이와 지금 내 나이가 비슷하다. 그때 그 문장은 지친 그를 잡아주던 문장이 아니었을까. 그만두고 싶다가도 해야 하는 염증 같은 일에서 그를 유연하게 지켜낸 문장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삶의 유연함을 배운 게 아니었을까 하고 자주 가늠해 본다.


내 안의 단단한 힘을 가꾸면서도 유연함까지 겸비하고 싶은 욕심이 솟는다. 그에게 슬쩍 물어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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