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출발선이 0이고 성공이 1이라고 해보죠. 비싼 돈과 시간 들여 날아가서 면접 봤어요, 마지막 순간에 제가 떨어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불합격이면 그냥 제로, 원점이 되나? 밑지는 건가? 아니죠. 떨어져도 0.9의 경험을 얻고, 그게 내 몸에 쌓이잖아요.
이길보라 인터뷰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칼럼
몇 년 전 이야기다. 이력서를 넣으며 구직하던 중, 스펙 없이 지원할 수 있는 대기업 취업 전형이 눈에 들었다. 여러 계열사 중 광고회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모집 직종에 카피라이터가 있었다. 무슨 호기가 생겼는지 ’계급장 떼고 붙어본다‘는 조건에 구미가 확 당겼다. 학력을 포함한 스펙들은 제외한 이력서와 작업한 포트폴리오, 새로운 주어진 과제를 제출했다. 얼마 뒤 채용담당자에게 1차 합격 메일을 받고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면접자리엔 여성 두 분이 면접관으로 있었다. 두 분 다 매우 차분한 말투로 본인들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광고회사에서 CD라고 불리는, 제작 전반을 총괄하는 디렉터-로 소개했다. 같이 일하게 될 실무자와의 자리인 것이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면접이 시작되었다. 여러 질문에 앞서 대뜸 “왜 본인을 궁금해했는지, 알 거 같아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들의 생각을 도저히 읽지 못했다. 모르겠다 말하니 “다양한 경험들이 많아서 궁금했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광고회사 인턴을 경험했고, 그 뒤 방향을 바꿔 음식 관련 자영업을 했다. 구직 중 운 좋게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참여해 티비광고를 온에어한 적도 있다. 비단 광고, 마케팅 영역을 넘어 살아오며 경험한 다채로움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을 자극했다고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대체로 그들은 카피라이터의 업무에 내가 잘 맞을지에 대한 질문을, 나는 그간 내가 쌓은 경험들이 실무와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를 소상히 말했다. 그렇게 면접이 끝났다.
채용 면접이라기보다 실무자와 인터뷰를 하는 기분이었다. 좋은 대화가 오고 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을 닫고 나왔을 때 진행을 도와주던 직원은 여태까지 본 면접 중 분위기가 가장 좋았고, 면접관 두 분이 가장 많이 웃었던 것 같다며, 내 합격을 응원하고 기원해 주었다. 받은 느낌과 그 말로 기대감이 굉장히 커졌으나 결과는 합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아마 나보다 더 능력 있고 자리에 알맞은 이가 있었으리라. 결과가 좋게 이어지진 못했어도 ‘다양한 경험이 내게 큰 재산이 될 수 있구나’하는 울림은 낙방한 지 한참 지나서야 내 머리에 떠 올랐다.
‘이 채용에서 합격하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상심하지 말 것이며, 이 또한 경험이니 든든한 자양분으로 만들어 성장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뒷모습을 보이며 면접실 문을 닫고 떠나는 내게 그들이 이런 메시지를 던진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결과를 떠나서 참 고마웠다. 본인들의 신입시절을 떠올리면서, 사회라는 출발선에 선 여러 청춘에게도 비슷한 말들을 전했으리라 본다.
직원의 행복을 중요시 생각하고 독특한 집단 문화를 가지며 일하는 도쿄R 부동산 구성원들은 ‘인생을 커리어보다 여행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말한다. 인간이 느끼는 행복은 저마다 다르기에 한 가지 기준점으로 평가하기보다, 마치 여행하듯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호기심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묻는다. 커리어만 따지며 사는 것은 너무 딱딱하다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광고회사를 다니다 그만두었다. 회사 생활은 내게 그렇게 맞지 않는 것 같다. 회사를 나오면서 커리어 차곡히 쌓는 행위를 선택지에서 제외하면서 나는 자발적으로 경력을 단절시켰다. 남은 것은 아직 해보지 않은 경험들을 하나씩 채워 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 경험들이 쌓여 지혜가 되고 나를 만들어 줄 것이다. 경험의 힘을 믿으며 나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