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일 : 약속 장소

약속 장소를 정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by 몽상가 J

우리 집은 서울 끝에 위치해 있다. 방송 일을 하다 보면 대부분 상암, 여의도, 목동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우리 집은 동쪽 끝이라 일터로 가기 위해서는 최소 한 시간 반 전에 출발을 해야 늦지 않는다. 멀리서 다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학교나 직장에서 멀리 사는 사람들은 워낙 일찍 출발을 하기 때문에 지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오히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지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집이 멀기 때문에 외출을 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할 때가 있는데, 일 때문에 장거리를 오가고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가끔 지인들과 약속 장소를 잡는 것이 피곤할 때가 있다. 내 지인들은 내가 어디에 사는지 거의 다 아는데, 한 번만 말해줘도 너무 멀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기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은 일이 아닌 지극히 사적인 모임으로 나와 만날 경우 중간 지점을 찾는 등의 배려를 해주는 편이다. 그리고 가끔은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까지 와주는 경우도 있다.


배려를 해주는 친구들이 있기도 하지만, 간혹 약속 장소 때문에 서운함을 느끼게 하는 경우들이 있다. 100번을 만나면 95번은 나 하나 희생해서 지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나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화가 날 때가 있다. 마치 다수가 서쪽에 살고 있으니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 하나가 서쪽으로 오는 게 맞는다는 듯 당연하게 나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약속 장소를 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솔직히 그런 사람들은 만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가 상암으로 일을 나갔을 때 만나거나 아니면 다음에 보자는 식으로 말을 돌린 적도 있다. 나의 희생을 바라는 쪽이 친구들이라면 솔직하게 말을 한다.


"나 너무 멀어. 인간적으로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


약속 장소가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 문제로 사이가 틀어진 경우가 있었다. 몇 년 동안 정말 친한 친구였던 A와 B, 그리고 몇 명의 무리들. A는 약속을 잡을 때마다 자신의 상황을 들먹이며 매번 자신의 집 근처로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몇 년 동안 B와 무리들은 A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A의 집 근처로 달려갔는데, 어느 날 B가 A에게 집에서 조금 먼 곳으로 나오라고 하자 A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던 것. 결국 B는 그동안 모두 A를 배려해 줬는데 어떻게 한 번 나오라는 말에 불편함을 드러내냐며 화를 냈고, 두 사람의 관계는 깨져 버렸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단순한 이유였지만 그 무리 중 한 사람이었던 나는 B의 입장과 같았기에 A와는 서먹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오늘 약속을 잡다가 나 역시 빈정이 상했다. 내일 점심을 먹자는 두 명의 선배와 약속 장소, 시간을 정하는 상황이었다. 두 명 중 한 명의 선배는 우리 집이 멀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사적인 만남을 가질 때면 그 사실을 까맣게 잊는 건지 본인의 집 근처에서 모이길 원했다. 그들이 우리 동네 근처로 와서 만남을 가진 적은 없다. 그래서 중간 지점이라고 생각되는 동네를 두어 군데 말했더니 거긴 잘 모른다며 기어코 자신의 집 근처에서 보자는 말을 했다. 나라고 내 시간을 허비하면서 그들을 만나러 가고 싶겠는가? 내가 95번을 가면 5번 정도는 와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이 불편하고 싫은 건 남도 불편하고 싫은 건데, 왜 타인을 배려할 생각은 하지 않는 건지.


코로나19 때문에 사람을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한 두 번 외출을 하다가도 내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게 된다. 고작 약속 장소 때문에 빈정이 상하고, 절교를 하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왕복 세 시간을 허비하는 일을 최소 10년간 지속해본다면 어떤 심정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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