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 머리 위에 있고 싶은 두 손바닥. 세상이 삐죽거리며 깨어져 쏟아 내려도, 당신이 나의 아래에 있다면 그것들은 희망이다. 다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참 다행일 것이다.
- 오휘명 <당신이 그 끌림의 주인이었습니다> 中
내 앞에서는 언제나 강한 사람이었던 K. 내가 힘들 때면 징징거림을 받아주었고, 우울할 때는 K만의 위로 법으로 나를 달래주었다. 고작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어른이었지만, 내 삶 속에 있는 그는 너무나도 큰 어른이었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길들여 놓으면 당신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냐며 입을 삐죽이기도 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 진심을 알아챈 K는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런 걱정 하지 마.'라는 말로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나는 상상 속에서도 K가 무너지는 모습을 떠올려 본 적이 없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침착함을 유지했고 냉정한 사람이었기에, 내 앞에서 약간의 애교 섞인 눈짓이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그가 보여주는 흐트러짐의 최고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K도 버거운 일들로 인해 주저앉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K의 복잡한 감정이 내게 전달된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K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가 힘들 때 내 어깨를 빌려 가주길 바랐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내버려 두는 게 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연애가 시작되기 전, K는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나에게 큰 어른이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힘들 때마다 어깨를 내어주던 어른이 있었다고. 우리의 연애가 시작된 후에도 K가 그 사람과 가끔 연락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연락이 만남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K가 많이 울었어."
동료들과 술자리를 갖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엄포를 내렸던 날, 내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던 그가 참 많이도 울었단다. 그저 놀라워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는 동료의 말에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가 왜 울었는지 물었다.
"힘든 일이 있었나 봐. 이유는 말 안 하는데, 갑자기 울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금방 정신을 차리긴 했는데 원래 냉정하던 사람이 그러니까 되게 안쓰럽더라고."
내 앞에서도 울지 않는 그였다. 그저 내 눈물을 받아주던 그였다. 머릿속은 복잡해졌고, 마음은 갈기갈기 찢겼다. 일이 힘들었을까?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친한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나? 그것도 아니라면 K의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어떤 일이든 나에게 먼저 털어놓고 의논해야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과 함께 서운한 마음도 폭발했지만, 그보다도 아픈 마음 하나 끄집어 내지 못하는 그가 걱정되어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날 밤, K와 한참을 걸으며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의미 없는 대화들로 분위기를 띄울 뿐이었다. K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강한 사람인 척했고,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철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인 척했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고, 또 어리석었다.
그날 당신은 왜 울었을까요? 그리고 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당신이 힘들면 내가 당신을 토닥여줘야 하는 거잖아요. 왜 나를 우두커니로 만들어요. 그런데 나도 정말 이상하죠. 다른 사람이었다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이야기하라고 떼를 썼을 텐데 당신한테는 그럴 수가 없었어.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당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혹시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이 그리워서 울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는데도 질투의 감정보다는 당신이 걱정되는 거예요. 속이 부서지는 감정을 꺼내지 못하는 당신이 너무 많이 아플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