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위의 집
2014년 12월.
한국에서 나의 언니가 방문했다. 우선 네덜란드에서 언니를 만나 2015년 1월에 함께 베를린으로 왔다. 1월 중순에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그룹전을 하기로 했고 다음 레지던스도 알아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언니에게 내가 사는 아파트는 정말 오래되고 칙칙하다고 경고를 했건만. 언니는 트렁크를 끌고 4층(실제로는 8층처럼 느껴진다)까지 낑낑대며 올라온 후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꼭 이렇게 살아야 하냐면서 엉엉 우는 것이다. 언니를 달래 주면서 '난 아무렇지 않아'라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여기 베를린을 사랑하고, 또 열심히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곧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있을 거라고.
언니는 베를린이 너무 우울하다고 했다. 물론 1월이었으니, 3시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은행이던 슈퍼마켓이던 어디나 노숙자들이 있고, 독일인보다는 외국인이 많고.. 등등. 안 좋게 보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럴 때 나의 7번 방 청년의 도움이 필요했다. 네덜란드에서 그래도 자주 베를린에 와주었던 내 반쪽.
그는 언니에게 '누군가에게 베를린은 꿈의 도시이다. 켈리가 그곳에 잘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길 바란다.' 말해주었다. 언니는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내내 불평과 걱정의 연속이었지만, 한국에 돌아간 후에 역시나 이곳이 그립다고 말했다.
2015년 3월에 네덜란드의 전에 머물던 레지던스에 자리한 카페 공간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북경과 베를린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디렉터를 지인으로부터 소개받고 그쪽에도 레지던스가 있다고 해서 4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아티스트 레지던스에 머물게 되었다. 집 계약이 3월 말이 끝나는터라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1월 말에 네덜란드에 잠시 들렀다가 2월 초에 다시 베를린 그리고 3월 초에 다시 네덜란드로 가야 했다.
그러나 그때는 설레었다.. 고 말할 수 있겠다. 나의 7번 방 청년은 네덜란드에서 허름한 빌라의 '창고'를 방처럼 개조해서 살았고, 그러면서도 나를 응원해주었다. 나는 그가 그런 곳에 사는 게 가슴이 아팠지만 베를린에서의 내 처지 또한 그리 낫지 않았기에 함께 견뎌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사실 현실적으로는 더 절망적이어야 했지만 워낙 비현실적인 나이기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그림은 하나도 팔지 못한 채, 중국인 디렉터와의 약속 때문에 허겁지겁 베를린에 와야 했다. 나는 절실했었다. 다음에 살 집이, 그리고 아티스트로서의 입지가. 베를린에서의 삶이.
역시나 이번 레지던시도 매달 60만 원 정도의 방세를 내야 했고, 조금 황당했던 것은 전에 갤러리에서 소개한 곳이 내가 이미 서류를 내서 들어갈 뻔한 레지던시였다. 당시에 렌트비가 비싸다고 느껴서, 서류심사를 통과한 후에도 매니저에게 사과하며 안 돌아간 곳이었다. 그런데 그 중국인 디렉터는 자기 '철새 레지던시(영어, 실제 이름)'에서 그 레지던시와 협력하여 작가들이 머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프로젝트와 갤러리에서의 전시 등을 약속했다. 그곳에 있다 보니 중국에서 오는 작가들은 모두 갤러리에서 후원을 해주는 듯했다. 왠지 나만 렌트비를 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3개월 후 그 미심쩍은 느낌은 현실이 되었다. 그 디렉터는 나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어쩌면 스튜디오 방문 후 실망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포트폴리오 심사와 인터뷰를 거쳐 그 레지던시에 들어갔고, 렌트비도 다 내야만 했는데. 3개월 후 내게 돌아온 것은 보증금뿐이었다.
그녀가 약속했던 모든 것은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는 불확실한 변명으로 변질된 채, 나는 그 레지던시를 나와야만 했다. 마침 한국에서 온 친구가 이런 불공평한 상황은 따져야 한다며 같이 가서 차근차근 설명을 했지만, 그녀는 흡사 뱀처럼 이리저리 모든 수의 가능성을 피해나갔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들이 참 많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모든 것은 과정이다. 이유가 있다. 이 경험에서 배우자..라고 수십 번 말해야 한다. 또 다른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멀리서 날아온 나의 멘토 언니의 메일을 보고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넌 참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리고 정호승 시인의 시를 보내주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위로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나처럼 절망을 경험해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혹은 나보다 훨씬 현명하게 살아가는데도 자주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이다. 나는 자기 집을 끊임없이 만드는 거미를 내려다보며 우주에서 나를 보면 저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여리고 약한 집. 그러나 생존을 위한 본능. 내가 사랑하는 일이 내 생계에도 도움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만든 그 얇고 투명한 집에 잠시라도 누워 쉴 수 있다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돼라
-정호승 시인-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돼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돼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돼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돼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립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비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