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집
내가 태어난 연희동 집의 작은 정원이 온 세상인 줄 알았던 나.
갑자기 집 앞에 차가 쌩쌩 달리는 마포구의 한동네로 이사 와서 지하철을 타고 고등학교와 대학교 그리고 버스와 도보로 다녔던 대학원. 그렇게 다시 서울이 온 세상인 줄 알았던 나.
늦은 나이? 갑자기 네덜란드에 무작정 와서 외딴섬과 같은 아티스트 레지던스에 머물고.
어리벙벙하게 베를린까지 가서 고군분투로 2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다시 1년의 시간을 살고.
지금 나는 독일의 한 도시에서 일을 하고 있다.
내게 무지로 이루어진 세상은 사실적 면적을 떠나 참 넓게만 느껴진다. 다 아는 것만 같았던 서울은 이젠 내게 아득한 고향이 되었다.
한국에서 여전히 내게 힘을 주고 계신 나의 멘토님, 그녀의 도움과 예술가 분들의 열정으로 이 곳에서 한국 작가들의 그룹 전시를 열었고,
나는 여기서 그들의 작품들과 1년여의 긴 여행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힘든 시간들이 지나갔다.
글을 쓸 수 없었다. 많은 순간들이 감사했고 충만하였지만, 이곳에 글을 쓰기엔 뭔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이어리에 감정적인 글들이 가득하다.
어처구니없는 감정의 변화 속에 저지른 실수들.
그리고 내가 내게 하는 사과. 내가 나를 믿어주지 못했음을,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부족했음을 사과했다.
어제는 새벽에 깨어나 여전히 내가 지고 있는 짐들에 눌려있음을 알았다. 스트레스를 핑계로 하나 두 개 씩 샀던 쓸데없는 물건들.. 여전히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들..
언제쯤 모든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삶을 예술로 살기 위해 나는 여기에 왔다.
그래서 뭔가에 쫓기듯. 항상 나 자신보다 내가 '하는 일'이, 보여지는 것이 중요했던 시간에서 도망쳤다.
이곳에서 나는 생각보다 내가 강하다는 사실에 계속 놀라는 중이고
여전히 수많은 실패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내가 끊임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음이 너무도 감사하다.
책으로부터,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공부'하지 않으면 나는 살아가기가 힘들다. 공부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 삶을 이해할 수가 없다.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말이 나는 이제 이해가 된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내 선생님이다. 그렇게 유럽에서 내가 겪는 크고 작은 경험들은 내가 '나'일 수 있게 도와준다. 딱 그만큼 나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 한계를 똑바로 볼 수 있기에 나는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내 꿈은 이제 스스로 무한 확장되고 있다.
의미 있는 일.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소유욕을 채우기 위해 존재한다거나 혹은 내 명예와 안정 그리고 내 가족을 위해서만 해야 한다면.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이미 내 가족에게 너무나 많은 신세를 졌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성장시켰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 내가 정말 행운이라고 느낀 것은 언제나 나를 버티게 해 준 가족의 믿음과 사랑이었다. 사실 당연하게도 모든 인간이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하는데. 세상을 돌아보면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나 또한 이곳에서 인종 때문에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런 내가 또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도 했다.
그 잘못된 판단 뒤에는 언제나 잘못된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요즘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테러들이 그 정확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러한 어리석은 믿음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배우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
끊임없이 한계를 마주하는 것에 지치지 않을 것.
오늘 특별히 지친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