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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 켈리장 Oct 20. 2018

각설탕이 녹는 시간

-feat. 한강 -흰

 

... 중략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단것을 특별히 좋아하진 않지만, 이따금 각설탕이 쌓여있는 접시를 보면 귀한 무언가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 한강, 각설탕 _흰 중에서.


나는 지금 특별한 작업환경에서 머물면서 끊임없이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해온 작업들을 돌아보면 모든 주제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 낙원'에서의 멈춘 시간과 사라진 시간

스틸라이프-Still life 시리즈에서 표현한 정지된 시간

흔들린 사진에서 멈출 수 없는 시간을 포착하려는 의도.

그리고 이 곳. 모든 시간이 녹아내린, 그래서 영영 의미를 상실할 수 없는 이 곳에서 나는 흰 시간을 만난다.


한강 작가의 책을 베를린의 서점에서 찾았을 때 그 반가움과 뿌듯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책 표지에 '흰'이라는 제목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어서 더욱 좋았다.

그리고 그녀의 글은 언제나 그렇듯 아프고 선명했다.

내가 이곳에서 죽음에 대해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평면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쓰는 동안 나는 그녀의 입체적이고 선명한 글을 읽었다. 그녀가 담담하고도 아프게 말하는 시간과 내가 언제나 표현하려 애쓰던 시간은 어떤 지점에 만날 수 있을까.

The 네가 있던 그 자리_The place where you were _사진 _켈리장2017

흰 것들의 단어를 모으고 그 하얀색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 흰 공간 아래 숨기도 하면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써 내려갔으리라. 감히 생각해본다.

이 책을 다 읽을 때쯤 나는 오래전 일본 나오시마 근처의 작은 온천 호텔에 갔을 때를 기억했다. 시간의 흔적을 낱낱이 드러내는 그 낡고 오래된 호텔에 있던 정말 하얗고 깨끗하게 바스락 거리던 이불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 이불에 안긴 채 잠들면서 나는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나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온전히 이해받는 느낌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표적-그 일종의 폭력에 대하여 The Mark_캔버스에 아크릴릭, 혼합재료_2018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아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전쟁과 같은 끔찍한 일들을 겪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럼에도 일종의 폭력들에 여전히 굴복할 수밖에 없음에 끊임없이 슬픔을 마주한다. 내가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나쁜 어른'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언제나 간접적인 폭력을 가했던 이들과 다르지 않은 그의 맨 얼굴을 보고 난 후 나는 다시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서 온 마음으로 부서져야 했다.

The mark-스탈린-The place where you were 켈리장 2018

한 인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판단하고 그럼에도 그를 여러 방면으로 이용한 뒤, 모든 것이 당신 탓이다 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사람은 폭력적이다. 나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미투 운동이나 내가 학교와 사회에서 겪었던 불공평한 상황들이 모두 이러한 개인의 폭력성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그러한 개인이 권력을 가진 경우 내가 사는 나라는 쉽게 불행해질 수 있다.

오래전 이곳, 내가 머물고 있는 여기에서 종교 때문에 30년 동안 전쟁을 하고, 군국주의와 파시즘 등의 여러 이유들로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이 모든 비극은 사람이 해 온 일이니까.

각설탕 The sugar cubes 캔버스에 아크릴 켈리장 2018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도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타인이 남긴 흰 그림자를 내내 붙잡고 울 수밖에 없다고 한강 작가는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진정한 애도만이 우리를 그들에게 놓아줄 것이며 다른 체온이 다시 우리를 덥혀줄 것을 믿으라고. 타인의 의미는 그런 것이라고.

부서지면 부서진 채로 지나온 시간을 다 받아들인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의 글이 내게 알려주었다.

네가 있던 그 자리 _The place where you were _2018

사람도 공간도, 시간을 거부하고 무조건 새로워지려 하거나 젊음을 유지하려는 안간힘을 볼 때 늘 안쓰럽다.

나는 지금 변화에 적응해온 장소의 한가운데에 있다. 내가 있는 예술가의 집 근처에는 전쟁의 잔재들이 남아있고 아무도 그곳을 새롭게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변화가 두려워 고통에 안주하기보다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 이 버려진 장소는 아름답다.

참 고집스럽게 모든 관계로부터 버려지는 것에 저항하려는 나를 볼 때. 나는 그 장소를 생각한다.

각설탕처럼 내내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시간들은 각설탕처럼 쉽게 녹아내린다. 

그럼에도 어떤 기억들은, 고통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곳에 놓아 둘 뿐이다.


각설탕이 녹는 시간_The time when the sugar cube is melted_부분   아크릴, 혼합재료 캔버스_켈리장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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