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대 초반이 되어야 보이는 것들
뒤숭숭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누구를 만나거나 밖에 나가면 좀 덜한데, 혼자 집에 있으면 집 잃은 고양이 마냥 불안하다.
마음 둘 곳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난 분명히 안전하고 꽤 쾌적한 집에 있는데, 심경은 불안하고 정신이 없다.
그래서 집에 오면 뭔가에 집중하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앉아 맥주나 와인을 홀짝이면서 반대 편 빈 벽을 찬찬히 바라본다. 그게 불편해지면 낡은 쇼파에 누워 창 밖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다보면 온갖 상상과 바램의 나래들이 피어오르면서 현실과 몽상의 그 중간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방향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느낌이다.
살기 위해서 사는 느낌이다. 목표나 방향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리저리 할 수 있는 일을 해가며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간극. 향유하고 싶은 일상과 꾸려나가야 하는 일상의 간극.
이제 내가 할 것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슬프고, 지금쯤이면 30대의 치열한 노고로 안정감과 노련함이 깔린 분야가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것도 두렵다.
자꾸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삶의 부표를 잃은 자들이 기댈 것은 세상물정 몰랐던 어린 시절의 꿈 뿐이다.
어릴 때부터 꽤 성장한 고등학고 때까지 내가 되고 싶은 직업은 없었다. 그때에도 그냥 하나의 직업으로 규정하기보다 '무슨무슨 일을 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범위로는 한결같은 게 있었다.
'세상에 대고 글을 쓰는 사람'
이런 일로 밥을 먹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나마 구체적으로 설명드린 고 3 선생님은 '그렇게 되려면 어떤 분야의 대가가 되라'고 했다. 그러고 나면 그 사람의 견해를 싣기 위해 많은 지면이 달려들테니.
맞는 말이었다. 문제는 '어떤 분야'에서 대가가 될 것인가였다.
애초에 초반부터 난 구체적인 'become'에 대한 목표 없이, 그냥그냥 세상 일을 기웃거리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떠들어대며 살고 싶었던 것 같다. 무엇이 되는 것보다, 어떤 삶을 사는 것에 더 분명한 기호가 있었다.
그리고 아직 내 안 깊은 곳에 그런 바램이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들은 무엇이 되어야만 그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을 한다. 좀 억지로 비유를 하자면, 제품을 구매해야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는 식이다. 사회적 인사가 될 만큼 한 분야의 '대가'가 되어야만 글을 쓸 수 있고, 해외에 살기 위해서는 해외 취업이나 유학을 위한 신분이 필요하다. 어떤 position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position에 대해 난 기질적으로 반감을 가져왔고, 30대의 철이 들면서 그것의 위력을 인정하면서도 내 삶으로 끌어안지 못하는 이중적인 입장에 혼돈스러워 했었다.
팀장, 차장, 소속된 회사 같은 position은 삶에 정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나같이 상경계 전공의 사무직종사자들에게는 특히 밥줄과 연결되는 문제이다. 이 위력을 깨달은 나는 기질적 반감은 처리도 하지 못한 채 점점 더 집착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그럭저럭 먹고 살게 된다....
너무 어렵고, 비현실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40대 초반이 되었지만, 노후가 걱정이 되지만, 아직도 이 말을 버리지 못하겠다.
다시 한번 부여 잡고 기질적 반감에 굴복해야 할 것 같다.
Position. 이제 떠나보낼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