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갤러리스트 = 아트디렉터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일이 있다. 교사나 은행원처럼 업무와 일상을 누구나 짐작케 끔 하는 보편적이며 전형적인 일, 나머지 하나는 그 직업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나의 일이다.
느지막한 점심때부터 일을 하기 시작하고 네시쯤이면 어디론가 나가버린다거나 온종일 돌아다니며 전화 통화를 하는 것으로 업무가 끝나버리기도 한다. 네모난 사무용 책상 앞이 아닌 둥근 테이블에 앉아 얼굴보다 큰 접시 위에 예쁘게 올려진 콩 만한 음식을 썰며 누군가와 식사를 하는 것이 업무가 되기도 하고 주말이나 목요일 저녁 여섯 시쯤이면 열리는 갤러리 오픈식에서 핑거 푸드를 집어 들고 있다거나, 허리를 조이는 스커트를 입고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우아한 고객과 미술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있는 모두가 기대하는 예술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한다. 출장 가는 기차 안에서는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고서 책과 다이어리를 간이 테이블에 올려놓고 커피를 홀짝인다. 일 년에 3-4번의 해외여행을 하며 곳곳의 아름다운 미술품과 경이로운 건축물들을 돌며 감탄한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이면 고민하던 것들을 내팽겨 치고 큰 창가가 있는 카페에 앉아서 마음껏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할 수도 있고 비수기에도 세상 어디든 여행할 수 있는 유연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전시를 보러 다니거나 사람을 만나는 것, 카톡을 하는 것으로 업무가 끝나버리기도 한다. 뭇 직장인들처럼 지옥철을 타고 7시에 알람을 맞춰 일어날 필요도 없으며 내 모든 일상의 스케줄은 나의 선택과 계획으로부터 건설되고 바쁨과 여유의 리듬 또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난 얼핏 보면 누군가가 부러워할 만한 일상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를 쉽게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나 멋진 사진을 통해서 라면 혼란이 가중된다. 내가 업로드하는 사진에는 직업에 포함된 많은 머리 아픈 일들이 편집되고 오직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만 강조된다. 아름다운 부분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어떤 직업이던 마찬가지일 것이지만.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식음을 전폐하고 24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밤을 새워 다음날 외출 준비를 하면서 잠깐 정신을 잃기도 하고 망치와 공구박스를 들고 다니며 벽에 못질을 직접 하기도 한다.
내 키보다 큰 캔버스를 직접 나르는 일도 다반사다. 작품을 포장할 때는 스카치테이프를 가위 대신 송곳니로 마구마구 뜯어버려야 할 만큼 긴박하고 와일드한 상황 속에 내던져지기도 한다.
해외 출장 시 화물 작품 운송비 때문에 항공사 직원에게 진상을 부리고 우겨서 기어이 추가 수화물 지불을 면하며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고 전시 예산 절감을 위해 1인 4역 (번역가, 리플릿 디자이너, 행정업무, 그 외 잡부 ) 정도는 기본으로 소화해야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일, 그러니까 혼자서 작은 갤러리 시스템을 안고 운영하는 독립 갤러리스트인 것이다. 기업의 대형 화랑이나 국가나 시에서 운영되는 미술관에 근무하는 큐레이터나 갤러리스트 라면 상황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예술향유와 예술경영은 본질부터 다른 일이다. 나는 남다른 센스와 안목으로 예술을 내 삶 자체에 녹이고 살아가며 향유하는 것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 하지만 작가를 만나고 예술품을 전시를 만들거나 프로젝트를 수립하고 컬렉터를 상대하는 것이란 어떤 목표를 정해두고 달성하며 또 목표를 여 만들어내는 일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대형 갤러리를 제외한 개인이 운영하는 중/소형 화랑경영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테지만 전시비는 어쩐지 아무리 투자해도 넉넉한 느낌이 없다. 특히나 나처럼 순도 100프로 홀로 이끌어나가는 경우 밥을 굶고서라도 엽서나 팸플릿은 고급으로 , 작은 것보다 큰 부스를 사서 널찍하게 전시하고 싶은 , 그래도 더 다양한 전시에 참가하고 싶은 , 작가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부담가게 하고 싶어 들어가는 크고 작은 비용에는 최소한 나의 범위 안에서는 아까운 법이 없었다. 하지만 경영이라는 것이 나 혼자만의 열정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컬렉터를 상대하는 일은 어떠한가? 무리하게 할인을 요구하는 사람 , 작품 계약서까지 써놓고 잠적하는 사람 , 본인의 집에서 실수로 망가트린 작품을 무턱대고 새 걸로 교환해 달라는 사람 등 작가 입장에서는 아무리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어떻게든 중재하고 그들을 설득시키거나 양해를 구해야 하는 극한의 감정노동에 처하기도한다.
홀로 사업자를 내고 갤러리 대표로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해 현실보다 앞선 열정으로 아트페어를 무자비 하게 나가던 시절, 한 아트페어 행사가 끝난 뒤 카드 한도는 꽉 차고 통장 잔고마저 끝을 보일 때가 있었다. 일에 대한 성취감의 갈구와 열정이 극한을 찌르던 시기 부족한 전시비를 충당하느라 묶여있던 통장을 깨고 얼마 안 되는 전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전시 기간 동안 몸살 날만큼 고생을 하고 인건비, 운송비, 부스비로 모든 비용을 쏟아냈지만 그림이 단 한점도 팔리지 않은 적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충분의 실의에 빠질만했지만 내 통장에 얼마가 들어온 지 몇 점의 그림을 팔았는지에 대한 것에 대한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는데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당시 나의 감정은 오히려 행복과 성취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전시가 끝난 후 한겨울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그림을 옮기는 막일을 끝낸 후 엄마에게 전시의 결과를 묻는 문자가 왔다.
" 그림을 한점도 못 팔았는데도 지금 기분이 너무 좋다.
나는 이 일을 평생 해야만 할 거 같다는 강력한 기분이 들어서 미치겠어"
엄마는 " 잘됐다 축하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모든 이성이 마비되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듯이 난 내 일에 관해서만은 사랑에 눈먼 자의 입장이었다. 나의 일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진 뒤 열정만이 하늘을 찌르던 절정의 시기, 개화의 시기 , 권태롭던 시기와 안정의 시기까지 거쳐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한발 물러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지금까지도 확신한다. 정해진 길과 성공을 쫒아 목표를 달성해버리는 끝나 버리는 일이 아닌, 점진적으로 나의 시간과 끝까지 함께 흘러갈 이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성공이나 다름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