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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Oct 13. 2019

집주인과의 갈등

나갈래 나갈래


전 편에도 밝혔듯...


https://brunch.co.kr/@kellyyou/29


집주인 아주머니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집의 위치, 방의 컨디션, 희영 언니와 같이 지낼 수 있는 것, 화장실을 우리 둘만 사용해도 되는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사실 내 입장에선 아주머니의 기분 나쁠만한 언행은 싹 다 무시하고 아무 갈등 없이 그냥 조용히 계속 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사란 정말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분명히 올 때는 캐리어 2개만 들고 왔는데 그 몇 주 살았다고 짐이 어마어마하게 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일 없이, 조용히, 그냥 쭈욱....... 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주머니와 아들과의 갈등은 날로 날로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그로 인한 아주머니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나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


아주머니는 (짐작컨데) 학벌 컴플렉스가 있는 것 같았다. 내 한국에서의 출신 대학도 물어보고, 내가 그리피스에서 교환학생을 했다고 하니까 그런 꼴통(?) 대학엔 왜 갔었냐며 그리피스 대학 비하 발언도 했다.


나랑 희영 언니는 퀸즐랜드 대학 (UQ, University of Queensland)에서 석사 공부를 하고 있었고 아주머니 게임쟁이 아들은 퀸즐랜드 공과 대학(QUT, Queensland University of Technology)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사실 퀸즐랜드에서는 UQ가 제일 좋은 대학인 건 맞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사실상 대학이 평준화되어있는 편이기 때문에 서열이 한국처럼 커다란 의미가 없으며, 대학 학위가 있냐 없냐의 문제지 어느 대학을 나왔냐는 엄청난 차이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대학의 타이틀에 조금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예를 들자면, UQ=퀸즐랜드의 제일 좋은 대학, QUT=퀸즐랜드 대학 못 가면 가는 곳, 이런 식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아주머니는 우리는 유학생이라 손쉽게 UQ에서 공부를 하는데 아들은 현지인이라 힘들게 공부해도 QUT를 들어간 상황이 아주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하루는 아주머니가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내게 이상한 말을 했다.


-너네는 돈만 내면 UQ 입학할 수 있어서 좋겠다~ 우리 아들은 힘들게 QUT 갔는데. 사실 우리 아들이 입학한 과는 UQ보다 QUT가 훨씬 더 좋아~ 그 과만 포기했어도 다른 과로 UQ에 갈 수 있는데 굳이 그 과를 고집하는 바람에 QUT 갔잖아~

-여기서 뭐 대학 타이틀이 중요한가요. 자기 좋아하는 거 공부하는 게 맞죠.


냥 무심하게 대꾸를 했는데 이게 왠지 모르게 아주머니를 더 발끈하게 만든 것 같았다.


-너도 만약 호주에서 시험 쳐서 갔으면 UQ 입학 못했을걸? 유학생이라 망정이지~


이 발언은 뽝 하고 열이 뻗쳤다. 나도 어이가 없었다.


내가 그 유명한 한국 고3이었는데. 뼈 빠져라 야자하고 야자 끝나면 학원 가고 학원 끝나면 EBS 보고 새벽 2시에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코피 쏟아가며 3년을 했는데, 그리고 심지어... 공부도 잘 했는데.


내가 호주에서 그만큼 했으면 UQ를 못 갔을까?


호주 중/고생의 한국에 비해 정말 적은 공부량과 대학 진학률을 정말 잘 아는 나로선,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발언이었다. 천지가 개벽해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저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어요... UQ 갔을수도 있어요.

-참 나. 넌 공부 잘했다는 애가 XX대학교 나왔어?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어이가 없어 그냥 입을 다물자 아주머니는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너네 유학생들은 여기~ 사실~ 돈만 주면 따는 학위잖아~


그 '돈만 주면 따는' 학위 따려고, 어제도 밤새 책 펴 들고 에세이 써 대고 시험 스트레스에 밥도 잘 넘어가지 않던 나에게 커다란 모욕을 주는 발언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한 마디 했다.


-아주머니 아들도 한국 가면 외국인이라 서울대 쉽게 입학할 수 있어요. 졸업이 문제지. 한국말로 시험 치고 공부하고 해야 하는데.. 글쎄요. 졸업이 쉬울까요? 전 모르겠네요.


아주머니가 어버버 하는 사이 얼른 1층으로 내려왔다.


이때부터였을까? 아주머니가 나를 싫어하게 된 게...

뭐 알 수 없는 일이다.


2.


그때만 해도 침을 먹지 않으면 하루가 시작이 되지 않았다. 아침 수업이 있는 날엔 특히나 더했다. 뭐라도 먹고 커피를 한잔 들고 들어가 수업을 들으면 머리가 돌아갔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기운이 없었다


호주에서 제일 즐겨먹던 아침은 씨리얼이었다. 두세 종류의 씨리얼과 우유만 사 놓으면 더 필요한 게 없었다. 매일 아침 국그릇 가득 씨리얼을 붓고 우유에 말아 얼른 아침을 먹고 나서 학교로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먹으러 2층 부엌에 올라갔는데,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켈리야. 내가 할 말이 좀 있어.

-네, 말씀하세요.

-너가 호주에 살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 호주식 예의를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아침에 니가 먹은 그릇은 식기 건조대에 엎어 두지 말고 물기까지 닦아서 그릇장 안에 넣기까지가 니가 할 일이야. 그냥 씻어서 식기건조대에 엎어 두고 가는 건 참... 어디서 배운 건지... 한국 엄마들은 그런 건 안 가르쳐 주나 보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매일 아침, 그릇 여러 개도 아니고, 씨리얼 그릇 딱 하나였다. 그 그릇 딱 하나를, 남의 집에 사는 탓에 눈치가 보여, 설거지까지 하고 식기건조대에 엎어두고 갔는데, 그 엎어둔 그릇을 천으로 물기를 닦아 그릇 장에 넣어두지 않았다고 우리 엄마 이야기까지 입에 오르내려야 하나 싶었다.


아주머니는 식기 세척기를 써서 싱크대 옆의 식기건조대는 전혀 사용하질 않았는데, 식기 세척기는 하루 이틀 치를 모았다가 한 번에 돌렸기 때문에 우유가 닿은 그릇은 냄새가 난다고 넣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매일 씻어서 식기 건조대에 올려두고 간 그 그릇 한 개가 눈에 거슬린 거였다.


몇 날 며칠 거기 엎어둔 것도 아니고, 매일 돌아와서 저녁이 되면 잘 말라있던 그릇을 도로 보관함에 넣어두곤 했는데, 이런 일로 가정교육까지 운운하다니 정말 너무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네. 죄송합니다.


대답을 하고 먹으려던 저녁도 먹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집주인 유세가 이런 건가 싶었고, 별 거도 아닌 일에 서운함과 우리 집 생각이 밀려와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호주에 또 왔나 싶어서 침울해졌다.


아주머니 말대로 그것이 호주식 예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그릇 먹고 물기도 닦아서 바로 넣어줬음 좋겠어,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저런 식으로 울 엄마까지 이야기하는 기분 나쁜 화법은 도저히 용서가 되질 않았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참기 힘들어서,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날 밤.


퇴근한 희영 언니를 붙들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언니. 너무 미안한데 나는 이사 가야겠어.. 너무 스트레스가 많아.


희영 언니는 그때 공부와 알바로 너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어서 집에 와서는 밥은커녕 잠만 자고 나가는 생활의 반복이라 아주머니와의 갈등도 적었다. 아주머니가 헛소리를 해도 언니가 워낙 바빠 '다음에 얘기합시다'하고 얼른 내려왔고, 사실 아주머니는 그런 희영 언니가 좋았을 것이다. 방은 내줬지만, 집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


하지만 나는 아침 먹은 그릇도 꼴 보기 싫고, 저녁 먹을 때 마주치는 것도 싫었을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빙산의 일각이었다)를 들은 희영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말 너무했다며 함께 화를 내더니 너가 나가면 나도 나간다며 같이 이사 갈 집을 찾아보자고 했다.


속이 뻥 뚫리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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