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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Sep 13. 2020

드디어 만난 김..금치

금보다 귀하다


도하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다는 자체도 신났고 기대되었지만, 무엇보다도 김치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약속 장소로 가니 빌라 형식의 커다란 다세대 주택 건물이 나왔고, 주차 후 1층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드디어 김치를 판매하신다는 분이 나왔다. 인상이 좋으신, 50대 정도로 보이는 한국 아주머니셨다.


내가 상상했던 그림은, 그 분 현관에서 김치만 받아 들고, 돈을 지불한 뒤 바로 인사를 하고 나가는.. 그런 모양새였는데, 그 분은 우리를 보자마자 카타르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햇병아리임을 짐작하시곤 집 안으로 와서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흔쾌히 초청을 해 주셨다.


아마 내겐 그 분이 카타르에서 남편을 제외하고 처음 만나보는 한국사람이었던 것 같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단촐하고 없이 사는 우리에 비해 집은 뭐가 아주 꽉꽉 들어 차 있었다. 벽은 각종 액자로 빼곡했고, 바닥은 여러 종류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소파 위에도 러그, 식탁 위에는 식탁보, 커튼엔 이중 레이스, 냉장고 문에는 다닥다닥 붙은 온갖 사진과 엽서까지.


집을 보는 순간 '여기 오래 사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 티테이블에서 우려주시는 홍차와 간단한 다과를 곁들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그 분은 영국인 남편과 영국 어느 소도시에서 살다가 남편분이 도하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마지막으로 3년 도하에서 일을 하고 은퇴하실 계획으로 오셨다고 했다. 처음에는 3년 계획으로 왔는데, 도하에 있다 보니 남편분께 각종 개발 프로젝트가 더 생기고 일거리도 더 생겨서 3년이 4년이 되고, 4년이 5년이 되고, 그러다가 지금 7년째 도하에 본의 아니게 계시게 되었다면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신다고.


아주머니도 너무 심심하고 적적하다보니 김치를 담궈서 판매까지 하시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뼛속까지 영국인이신 남편분이 김치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진다며 너무 싫어했지만 본의 아니게 도하 체류가 길어지고 아주머니의 불만 지수도 올라가자 이제는 김치판매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하신단다. 오히려 아주머니의 취미 활동을 응원하며 배추 씻는것까지 도와 주신다며... 초면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귀여워서 슬쩍 웃음이 났다.


하지만 세상엔 공짜는 없었다.


우리도 왜 도하에 오게 되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을 밝혀야 했는데, 남편의 정식 포지션은 포닥(post-doc, 박사 후 연구원)이지만 사람들은 포닥이라고 하면 도통 뭔지 모르고 꼭 '교수'냐며 되묻곤 했다. 교수는 아니고 연구원이라고 하면 한국 국내 기업을 대면서 삼성? LG? 묻곤 했는데, 카타르 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면 그게 뭐냐며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외 현지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대기업의 주재원 아니면 파견으로 나와있는 직장인들이어서 현지 대학교 소속 연구원이란 존재는 생소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연구원이라는 직업에 대해 설명을 하자 아주머니는 한 마디를 던지셨다.


-그럼 현채에요? 주재원인거여요?


중요한 건, 우리는 현채도 주재원도 무슨 말인지 몰라서 모른다, 우리는 카타르 대학 소속이라고 말씀드릴수 밖에 없었데, 이 말은 재미있게도 중국 쑤저우를 가서도 늘 우리에게 따라붙은 질문이 되었다.


다음 편엔 현채(현지 채용) vs 주재원에 대해 써 볼 예정이다.


여튼 그 짧은 만남에 우리는 서로의 신상정보를 다 파악하고 실컷 수다를 떨다가 나왔는데, 아주머니는 의도치 않았는데 은근 말씀에 유머가 섞여서 나는 계속 배꼽을 잡아야만 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건, 카타르는 밖에서는 사람들이 다 카타르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닌다. 여자들은 아바야라는 시꺼먼 머리까지 가리는 망토 같은걸 입고, 남자들은 하얀색 망토 같은 의상에 머리에 원반 같은 고리를 얹어서 머리를 가리는 베일을 고정한다.


카타르 전통 의상. 모두가 밖에선 이걸 입고 있음. (출처-구글)


내가 카타르에 와서 모두가 저런 걸 입고 다녀서 너무 신기했다고 하자, 아주머니가 '아, 그 까마귀들.' 하시는 게 아닌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여자들은 검은 옷을 입고 다녀서 까마귀, 남자들은 하얀 옷을 입고 다녀서 백까마귀라고 불린다고...


나는 전혀 몰랐다고 여기 사람들은 그럼 다 그렇게 부르는거냐고 여쭤보니까, 그건 아니고, 아주머니 혼자만 그렇게 부르신단다. 쇼핑몰에 가도 까마귀, 관공서에 가도 백까마귀... 온통 까마귀 세상이라 아주머니도 처음엔 도통 적응하기가 힘드셨다며.


상상도 못한 희한한 묘사에 폭소가 터져 나는 집을 떠나는 순간까지 웃느라고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사기로 한 포기김치 3kg뿐 아니라 열.무.김.치. 그렇다 바로 그 열 무... 김치도 귀한데 열무김치라니... 하여튼 열무김치까지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의 대가라며 거하게 서비스로 얹어주셨다.


아주머니를 자주 뵙게 되겠구나 직감하며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처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을 준비했다. 김치를 영접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노래까지 부르는 날 보면서 남편은 김치가 그렇게도 좋냐며, 이런 토종 한국인을 도하로 데려와서 어떡하냐며 너무 미안하게 되었다고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김치를 2달이나 안 먹고도 생각도 안 날 수가 있는지, 내 쪽에선 그쪽이 더 이상한 생명체였다.


밥을 다 차려놓고 드디어 김치를 열었다. 여는데, 진짜, 이건 진짜다 하는 소리밖엘 나오지 않았다.


비주얼과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손맛 있는 분이 담그신 진짜 진한 김치의 향과 모습이었다. 해외 살면서 오랜만에 보는, 진짜 김치의 모습이었다.


조심스레 김치를 꺼내 썰어서 소분하고는, 반찬 그릇 위에 한 주먹 정도 올려서 저녁 상에 냈다. 경건한 마음으로 첫 젓가락을 집어드는데, 정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진한 맛의 전라도식 김치였다. 아직 익지 않아도 김치는 온몸으로 "나 맛있어요. 근데, 익으면 더 맛있을 거에요. 지금도 너무 맛있죠? 나 이렇게 색깔도 이쁘잖아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폭죽놀이가 시작되었다. 흰밥이 세배로 맛있어졌고, 김치가 있으니 스팸과 계란후라이도 조연에서 주연의 자리로 격상되는 마술이 시작되었다.


지상 최고의 파티가 있다면 바로 김치가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던, 그 곳의 그 저녁 식탁이었다.


그런데, 한 젓가락을 집어먹고 혼자 머릿속에서 파티를 열어놓고 오니, 분명히 눈앞에 가득 차 있었던 김치 접시가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파티가 스르륵 끝나버린 기분이었다.


-이게 뭐야? 이걸... 누가 다 먹었어?

-에이, 뭘 이렇게 조금 꺼내왔어. 더 먹자.


분,명,히, 본인은 김치가 먹고 싶지 않다고 했던 남편이, 그 많던 김치를 내가 한 젓가락 먹을 동안 다 먹어치워 버린 것이었다.


-내가 너무 적게 꺼냈나봐?

-그럼. 우리 먹는 양 자체가 다른 걸.


그렇지, 이젠 나 혼자가 아니지. 그래도 오빠는 남자다 보니 나보단 많이 먹고 한 입도 클 텐데, 너무 김치가 비싸다고 아껴서 조금만 올렸나 싶었다. 그때 아주머니께 사 온 김치의 정확한 가격은 기억이 안 나는데 키로당 3만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이번엔 인심 좀 쓰자. 나는 반찬 그릇 가득, 썰어논 김치를 리필했다. 밥 한숟갈에 김치 세 조각씩 먹어도 될 정도로 넉넉하게 김치를 떴다.


그러고 다시 밥을 한두숟갈 떴나,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김치 그릇이 또 텅 비어 있었다.


-오빠, 이게 뭔 일이래???

-으음?? (우물거리며 딴곳을 봄)

-모르는 체 하지마. 김치 안 먹고 싶다며?? 근데 이걸 다 먹었어??

-켈리야, 우리 김치통 채로 갖다 먹으면 안돼? 이거 나 안 되겠다.


우리는 김치 통을 끼고 앉아서, 그날 둘이 앉아서 못해도 김치 1키로는 먹어버린 것 같다. 3키로를 사왔는데, 저녁 한끼 후, 어느 새 김치는 줄어서 얼마 있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김치 생각도 안 나고 먹고 싶은 적도 없다던 남편은 .. 사실 생각이 안 났다는 것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없으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는 늘 그렇다) 살다가, 김치를 본 그 순간, 그가 아니라 그의 뼛속 깊이 새겨진 한국인의 DNA가 그것을 원해버렸던 것이었다.


그 후로도 매일 남편은 한국 음식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김치찌개를 끓이면 세 솥은 먹으려 들었고 (참고로 그는 평소 식탐이 없고, 아주 입이 짧다) 김치 볶음밥을 하면 김치를 곁들여 2그릇을 먹고도 남은 후라이팬까지 가지고 와서 긁어 먹었다. 카타르 도하에서, 김치 볶음밥을 먹으면서, 김치까지 곁들여 먹는 만수르 짓을 한 것은 아직까지도 두고두고 용서 받지 못하는 그의 만행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게 김치를 무서울 정도로 먹어치우는 남편에 대한 소심한 복수로, 그가 출근했을 때 나는 서비스로 받은 열무김치를 혼자 야금야금 며칠에 걸쳐 다 먹어버렸다.


남편은 그때 열무김치를 아주머니가 주실 때 크게 환호했더랬다.


근데, 아쉽게도, 그는 그걸 받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것.


어쩔 수 있나.


기억력이 거기까지인것을...


김치를 먹은 한국인 둘은 온순해져서 평온한 나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김치를 넣고도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있었으니, 바로 돼지고기였다.


카타르는 무슬림 국가로 돼지고기 판매가 일절 금지되어 있었다. 남편의 말로는 두바이에 살았을 때는 외국인이라면 돼지고기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카타르는 더 보수적이고 규제가 많아서 아예 파는 곳 조차 찾아보기 힘들다고.


소고기, 닭고기 먹으면 되지, 하며 나는 돼지고기의 부재를 콧웃음쳤지만 한달 뒤.


우리는 삼겹살이 너무너무 먹고싶어져 삼겹살 사냥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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