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에서 힘겹게 김치를 구했다. 김치를 구하기 전까진, 시원하고 아삭한 김치만 베어 물면 세상 원할 게 없을 것만 같았다.
아니. 같았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김치의 욕구가 충족되고,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희한하게도 삼겹살이 그렇게 먹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카타르는 무슬림 국가라 돼지고기의 취급과 판매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스팸 같은 것도 포함인데, 공항 검색대에서 운 나쁘게 스팸조차 다 빼앗긴 사람의 경험담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돼지고기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카타르였다.
마찬가지로 카타르는 술의 판매/유통조차 금지했는데, 그나마 술은 돼지고기보다는 나았다. 술은 호텔에 가면 외국인에 한해서 마실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돼지고기는 그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우리는 나날이 삼겹살 앓이를 시작했다.
삼겹살 뿐인가. 얇게 저민 앞다리살이나 대패 삼겹살로 콩나물과 고추장 양념을 넣어 자주 해먹던 콩불도 먹고 싶었고, 참치캔을 넣은 김치찌개 말고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어 넣은 김치찌개도 너무 먹고 싶었다. 보쌈.. 족발.. 제육볶음.. 돼지고기 요리가 이렇게 우리 식탁에 자주 올라오던 요리였나. 역시 없어지기 전엔 알기 힘든 것들..
그리고 사실 호텔에서 맥주를 사 마실 수 있다 해도, 매번 맥주가 생각날 때마다 호텔 바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해 보시라..
밤 10시, 즐겁게 남편과 드라마를 보고 있다가 문득 출출해져 감자칩을 뜯었는데, 맥주가 없는 그 기분.
편의점? 그런거 없다. 집앞 슈퍼? 그런거 없다. 설령 그런 게 있다 한들 술 따윈 팔지 않는다. 맥주를 마시려면 차를 운전해서 어디든 호텔로 가야 하고, 호텔에서 한 잔에 15000원-20000원 하는 맥주를 마실 수 있을 뿐이었다. 다 좋다. 그렇게 운전해 가서 맥주를 마셨다 치자. 그럼 올때는 누가 운전을 하냔 말이다... 카타르에서 음주 운전을 하다가 걸리면 그대로 추방인데. 그럼 닥터 킴은 바로 실직자가 되고... 우리의 가정 경제는 파탄에....
여튼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호텔에 맥주를 마시러 갈 때는 또 콜택시를 불러야 하고, 그러고 비싼 맥주를 마시고, 올 때도 택시를 타고 집에 와야 한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2014년) 카타르 도하의 택시 운전기사들은 우리같은 외국인만 보면 돌고 돌아가 바가지 요금을 씌워댔다.
그때 내가 만약 인스타그램을 했다면, 아주 팬시하고 럭셔리한 호텔에서 마신 맥주 사진, 안주 사진을 찍고 올리고...아마 그렇게 했다면 모두가 내가 카타르에서 졸부 생활을 하고 있는 줄 착각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현실은 이다지도 비참했다는 것....
이런 이유 때문에 정말 럭셔리한 호텔 바에 가서 맥주를 마실 기회가 있다 한들, 그 맥주 마시러 다니는 길이 전혀 즐겁거나 행복하지가 않았다. 뭐..사실... 진정한 주당은 집에서 마시는 거 아닌가요? (??!!)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어디 정말 잘하는 한국 식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식당엘 찾아 갔는데, 그 식당 메뉴판을 찬찬히 훑고 있는데 이상한 문구가 보였다.
<특별 메뉴 - 모두가 원하는 그거 있습니다>
그리고 음료 섹션에는
<쌀로 만든 그 시원한 음료 있습니다>
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 문구가 내가 기억하는 것과 100% 같지는 않을거지만 대체로 저런 뉘앙스였다. 저기요, 하고 사람을 부르니 한국인 사장님이 나오셨다.
-저. 죄송한데, 여기 적힌 모두가 원하는 그게..뭔가요?
-아, 삼겹살이에요.
-와! 삼겹살도 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적어 놓으셨어요?
-간혹 카타르 사람들이 구글 번역기를 돌리거나, 한국어를 배워 할 줄 아는 사람이 오곤 해요. 그러다보니까 그 분들께는 알려지면 안 되니까 저렇게 적어 놓은 거여요!
-그..그럼...혹시 쌀로 만든 그건..
-막걸리에요. 저희가 직접 담궜답니다 ^^ 카타르 사람들이 이거 뭐냐고 물어보면 식혜를 줘요 ^^
친절하신 사장님의 미소에 홀려 우리는 그날 삼겹살과 막걸리를, 말 그대로 뿌셨다.
아, 막걸리는 나만 뿌셨다. 불쌍한 남편은 입만 대고 먹지는 못했다는 .... 그는 운전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삼겹살과 막걸리를 먹고 나니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용암처럼 뜨거운 열정이 타올랐다.
맥주와 삼겹살을 기필코 구하고야 말겠다는 열.정.!!!열정! 열정!!!!!
그렇게 며칠 후.
남편은 모처럼 희소식을 안고 집으로 왔다.
돼지고기와 삼겹살을 파는 곳이 도하에 딱 한군데 존재한다는 것!!!
그 곳은 외국인만 출입할 수 있고, 그 곳에 출입하려면 허가증이 있어야 하는데 이 허가증도 돈을 내고 만들어야하고 각종 절차가 아주 복잡해서 여간 귀찮은게 아니란다. 하지만, 그가 학교에서 친해진 필리핀 박사님 한 분이 흔쾌히 자신의 허가증으로 함께 구매하자고, 거길 함께 방문하기로 하고 그 날짜까지 약속을 잡았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자리에서 춤을 췄다.
그런 소중한 자리... 진귀한 기회... 나도 따라가고야 말겠다..
그 곳에서.. 삼겹살은 5kg를 살테고.. 맥주는 5박스를 살테다...하고 단단히 다짐을 했다. 하지만.. 약속의 그 날.
나는 함께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선 열이 펄펄 끓고 끝없이 콧물이 나기 시작했다. 두통도 굉장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머리가 쿵쿵 울려 도저히 일어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런 여건에서 괜히 동행했다가 그 허가증을 함께 쓰게 허해주시는 귀한 분께 감기 바이러스를 선사할까봐 저어되어, 아쉽지만 나는 같이 가지 않기로 했다. 나는 누워서 끙끙 앓고 있는 와중에도 남편에게 단단히 일렀다.
-맥..주는....오빠 좋아하는거 사고.. 나는... IPA알지...?
-알지. IPA 사 올게.
-돼..지..고기는...삼겹살... 삼겹살 사면 돼... 삼겹살은... 수육 해도 되구.. 찌개 넣어도 되구.. 구워 먹어도 되니까.. 되도록 삼겹살로...많이 사와...
-응. 맥주는 IPA, 돼지고기는 삼겹살, 맞지?
-응... 꼭... 가능한 많이 사와 둘 다...... as..much..as..possible....
나는 맥주면 흑맥주 제외하고 종류 불문하고 좋아한다. 이상하게 기네스, 킬케니 류의 흑맥주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 별로다. 흑맥주를 제외하면 맥주라면 다 좋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건 IPA 맥주다. IPA는 Indian Pale Ale 의 약자인데, 그냥 시원한 라거 맥주와는 달리 특유의 향이 아주 진하고 알콜 도수도 높은 맥주다. 지금도 집의 김치 냉장고에는 Indica IPA가 가득하다.
여튼 내겐 IPA맥주와 삼겹살이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삼겹살을 노릇노릇 굽고, 맥주 한잔을 캬,하고 마시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게 누워서 타이레놀을 몇 알이나 먹고 행복한 상상을 하니 몇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QDC (돼지고기/맥주 파는 곳. Qatar Distribution Company 의 약자)에 다녀 온 남편이 위풍당당하게 맥주 한 박스를 들고 귀환했다.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몸을 일으켜 닥터 킴을 마중 나가니, 처음 보는 맥주가 놓여 있었다.
닥터 킴이 한 박스 쟁여온 맥주
-오빠, 이게 뭐야? 레페? 처음 보는 맥주인데..
-아우, 켈리야 말도 마. 거기 어찌나 사람이 많고 정신이 없던지...
-돼지고기는?
-삼겹살은 없다더라고.
-그럼 다른거라도 사오지 안 사왔어?
-응. 너가 삼겹살 사오랬잖아. 없어서 안 사왔는데?
-뭐????? 그럼 IPA는?
-그것도 없대.
세상에나 마상에나.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닥터 킴은 그곳에 가서 Pork Belly (삼겹살의 영어 표현)를 찾았고, 파는 분은 포크 밸리는 없다고 했단다. 그럴 수도 있다. 외국에서 삼겹살은 두툼한 지방 때문에 인기 있는 부위기 아니라, 없는 곳도 많다. 그러면 삼겹살이 없으면 다른 거라도 사 왔어야지!!!!! 포크 밸리 비스무리한거라도 사 왔어야지!! 없다고... 그..냥..오다니..
어떻게..그럴수가....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었다... 늘 별 생각이 없는 닥터 킴에게 "삼겹살만" 이야기 한 내 잘못이었다. 누굴 탓하리..
IPA도 물어보니까 귀찮다는 듯 없다고 하더란다.
사람은 너무너무 많고, 같이 간 필리핀 박사님은 하이네켄만 맨날 사신다고. 그 분은 하이네켄 한 박스를 이미 계산 후에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래저래 맘이 급해지고 당황한 그는 IPA를 외쳤건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황망한 나머지 본인 피셜로 IPA와 제일 비슷하게 생긴 (?) LEFFE라는 저 맥주만 들고 귀환했던 것이었다.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 망할 놈의 레페 맥주는,
...
흑맥주였다.
내가 유일하게 입에 대지 않는 그 맥주. 흑.맥.주.
남편은 특유의 단순한 성격 때문에 때문에 도하에서 이런 저런 요상한 행동과 요상한 일을 많이 했지만,
이 날의 일 또한 용서받지 못할 일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카타르, 모든게 처음이었던 우리에겐 그렇게 평온한(?) 나날이 하루 하루씩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이런 생활도 익숙해질 즈음, 매일같이 사막만 바라보던 나는 너무 심심해 우울증이 올 것만 같았다. 내가 이러려고 결혼을 했나,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어 한국으로의 짧은 도피를 꾀하던 찰나, 갑자기 한국어 강사 자리를 제의받고 얼떨결에 일을 시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