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고 평소에 챙기지 못하여 맘 한 군데 챙겨 두었던 첫 직장 선배 형님께 전화를 했다. 선배는 폰 스피커 너머로 여전히 밝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래. 잘 지내지?
넌 항상 적극적이니까 뭐든 잘하고 있는 걸로 믿어"
그랬다.
선배 형님은 나에게 신입사원 시절부터 몇 번 회사를 옮기고 만날 때마다 인정과 용기 그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던 분이었다. 아무런 얘기를 듣기도 전에 선배는 나에 대해 무한신뢰를 주시는 분이었다.
5년 만에 선배 형님을 만나다.
"형님. 시간 되시면 오랜만에 얼굴 뵙지요? 되실까요?"
"네가 보자고 하면 있는 약속도 없는 거야."
선배는 삼 년만 운영하고 그만하려던 에어컨 설치사업을 십사 년째 하고 있다며 너털웃음과 함께 경기도 모처의 한적한 사업장 주소를 보내왔다. 문자 메시지로.
한 시간 사십 분 남짓 달려서 대형 창고와 컨테이너 사무실 한 칸이 덩그렁한 선배 사업장에 도착했다. 곱슬한 파마머리에 귀밑머리는 새하얗게 염색이 빠졌어도 멋갈스럽고 통통했던 얼굴에 세월이 관통하며 선명한 두 줄의 이마 주름이 짙었다
그것은 치열하게 살아온 선배를 증명하는 훈장 같았다.
선배는 직장에서 세일즈의 거장이었으며 팀과 사업부를 훌륭하게 이끌었던 존경받던 리더였고, 딸과 아들을 잘 키워낸 헌신적인 아버지다. 이마의 주름 중 한 줄은 직장 나머지는 가족이었던 것이다. 선배의 자식에 대한 지원은 딸이 고3 때 대학입시정보교류 아빠방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서울대에 입학시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터였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으로 SKY를 간다고 했으나 선배의 경우는 예외였던 거다.
덕분에 다음 해에 필자의 딸도 H대학에 입학하는 데 그 블로그가 도움이 되었다.
아무튼 선배는 세일즈로도 자식 교육으로도 필자에게 건강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많이 준 고마운 형님이다.
딸을 울린 할아버지가 되어버리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선배가 요즘 들어 치열하게 사는 것에 대한 목표가 없어지고 작은 일에도 민감해진다고 했다. 순간 필자는 몇 년 전에 스치고 지나갔던 '5 춘기' 증상이 생각났고 선배에게 5 춘기 증상이 찾아온 것 같다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려달라 했다.
사건은 이랬다.
며칠 전 가족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데 서너 살 된 손녀딸에게 밥을 먹여주는 딸에게 한마디 했더니 딸이 울어 버렸다는 것. 선배의 눈에 손녀딸 입 주위에 음식들이 묻은 채로 계속 음식을 먹이는 딸이 포착되었고, 선배는 손녀딸 입 주위를 닦아주고 음식을 먹이라 하고 딸은 그냥 먹으면 된다고 하다가 "네가 계모냐? 계모들같이 아이를 방치한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거.
아이의 친모인 딸에게 자상하고 세심하던 아빠가 본인에게 '계모'라는 단어를 들었으니 그 딸이 속상함은 인지상정.
5 춘기 남편을 궁지로 모는 건 그런 순간에 아내.
당신은 왜 그런 단어를 써서 딸을 울리냐고 가서 달래주라고 했다는 거. 선배는 항상 가정의 질서를 위해 중심에 선배가 있어야 하고 선배가 설령 실수나 잘못이 있어도 자녀 앞에서 대놓고 당신을 잘못했다 지적하는 아내에게 또 서운했던 거다. 선배는 아내도 참 지혜로왔는데 이젠 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선배가 5 춘기에 접어든 것이 맞았다.
비교적 늦게 찾아온 거다. 육십삼 세이니까.
무기력해진다
사소한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잔소리가 는다
보기 싫은 것들이 많아진다
할 일은 없고 시간이 많다고 느껴진다
무언가 하는데 목표가 없다고 여겨진다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한다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근데 가출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느낀 대로 적어본 5 춘기 증세들이다. 선배에게 이런 증세 있는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렇다 한다. 두세 달 전부터 부쩍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로도 자녀 성장과 안정을 위해서도 더 할 일이 없어지고 나니 무력함을 느낀다 했다.
아버지는 5 춘기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산다
필자도 그랬다.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랬듯이 없는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개천 용이 나오기도 하고 대부분은 성실하고 묵묵하게 직업인으로 또는 상인으로 그저 그렇게 살았다. 다만 한 가지 자식에게 가난은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출근할 때 간은 안방 서랍에 넣어두고 퇴근하면 툭툭 털어서 다시 넣고 똑같은 하루를 몇십 년간 살다가 오십 대가 되어버렸다.
운 좋으면 어렵게 장만한 집 한 칸이 따따불 가격으로 오르기도 하고, 정년까지 한 직장에서 일하다 은퇴하기도 하고, 머리 좋아 SKY를 졸업한 또래들은 의사로 변호사로 대기업 임원으로 재력도 크게 일구기도 했다. 대부분은 평범해서 큰돈은 없지만 자식농사는 본인보다 더 나은 대학이나 직업을 가지는데 헌신하였고 아이들의 유년시절에 주말에만 잠시 볼 수 있는 아빠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거기에 그들은 '내'가 없고 '직장인 홍길동'과 '아빠' 그리고 '가장'의 타이틀만 갑옷으로 어깨를 감싸있었던 거다.
그들에게 어김없이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질문이 던져지는 것은 통과의례일 수밖에.
선배에게 용기 내어 말씀드렸다.
"형님. 버킷리스트를 적어보세요. 해보고 싶었던 것, 갖고 싶었던 것, 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 생각해보세요"
없다고 한다.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 알고 찾을 수 있으면 5 춘기 졸업이다. 초기 증상은 아무것에도 흥미나 의욕이 없는 '3 무 : 무기력, 무관심, 무소유' 이니까.
"형님.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책도 내보려고 해요. 나를 적어보고 나를 찾는 역사여행을 시작한 거죠. 저의 5 춘기 통과 솔루션이랍니다. 형님도 무엇이든 하나라도 선택해 보세요. 술 마시기, 놀러 가기, 친구 만나기, 운동하기, 책 읽기, 음악 듣기 그 무엇이든 선택해보고 한번 해보고 두 번 하고 싶어지면 그 솔루션을 반복하면서 그것을 통해 형님 자신을 찾아보세요"
일상에 5 춘기 탈출의 출구가 있다. 필자는 5 춘기를 넘기면서 가끔씩 '혼자 울기'를 했다. 나를 위해 살아보지 못한 젊은 청년이 안쓰러웠고 가난해서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던 어린 내가 대견했지만 마음이 아팠고 할머니에게 딸을 맡기고 직장에 올인했던 시절이 안타까워서 가끔 울었다.
어른이 된 딸과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급소를 깊숙이 찌르는 한마디를 들었다.
"아빠. 이제는 아빠로 살지 말고 홍길동이란 이름의 한 사람으로 살아."
그날 딸을 직장 사택 복귀하는 바람길이었고 데려다준 후 운전석에 앉아 또 울었다.
그렇게 팔자의 5 춘기는 지나갔다.
50대에도 60대에도 늦으면 70대에도 '5 춘기'는 온다. 그들은 예고가 없고 피할 수도 없다. 그들은 부자든 가난하든, 가정이 화목하든 그렇지 않든, 건강하든 병약하든, 직업도 성격도 취미도 성별도 인종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우리는 삶을 살고 있고, 삶은 살아내는 거고 살아지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 5 춘기 그들이 오는 거다. 그들이 찾아오면 당황하지 말고 이기려 하지 말고 반갑게 맞아 친구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