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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vinstyle Jan 01. 2024

저는 잡상인이 아닙니다!

회사문화 답사기 1

87년의 여름은 수출과 국내경기의 활성화로 인하여 많은 일자리가 열려있던 시절이었고, 특히 전역장교 출신들을 선호하던 직장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터라  전역을 앞두고 지원한 7개의 직장에 합격통보를 받은 후 어떤 회사로 가야 할지 검토와 고민 끝에 신도리코를 결정했다.


당시 신도리코는 일본 리코와 기술합작을 통해서 복사기와 팩시밀리만 제조 판매하는 기업으로 '사무 자동화의 효율을 제공하는 영업회사'로 국내 시장 1위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현대종합상사, 롯데호텔, 삼성화재, 베링거잉겔하임, 갑을무역, 신도리코, 중외제약까지 면접을 모두 통과하고 최종 선택 후보기업으로 현대종합상사와 신도리코를 정하고 고민에 빠졌다.


현대종합상사에서 근무하던 선배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선배는 신도리코로 가라고 했다.


전문기업이라는 점.

CEO가 되려면 영업으로 시작해야 비전이 있다는 점.

당시 삼성, 대우, 현대그룹보다 높은 연봉 등을

추천의 이유로 조언해 주었다.


직장에 대한 정보나 사회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단절되어 있었던 터라 선배의 말을 신뢰하고 신도리코로 입사했다.


87년 그 해 여름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는 타인과의 관계 맺기 연습의 시작이었다. OJT 시작은 큰 소리로 인사하는 훈련이었다. 군 시절 호령과 지휘만 하던 장교가 말쑥한 슈트에 넥타이까지 매고 "안녕하십니까?"를 큰 소리로 외치며 90도로 폴더접이 인사를 하는 훈련은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의 현실강림 스테이지였다.


한 달간의 OJT가 끝나고 지점으로 발령을 받은 후

세일즈맨의 루틴을 매일 반복하였다.

매일 아침 08시 30분에 출근하여 30분간 영업일지 제출과 짧은 영업회의를 하고 09시에 전 직원이 모여 큰 소리로 세일즈 십계명을 큰 소리로 외치고 "안녕하십니까?"를 세 번 반복하 외친 후 영업현장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나갔다.


당시 세일즈 십계명 중 잊히지 않는 두 가지는


-거절은 세일즈의 시작이다.

-머리와 발에 밸런스가 잡힌 세일즈를 하자.

였고, 이 구호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지는 일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80년대 후반은 '영업 또는 세일즈'라는 단어조차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고, 영업이라는 단어는 보험사원이나 잡품을 판매하는 상인 정도로 평가절하하던 시기였음을 당시의 현장에서 실감하였다.


사무실 문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경비실을 통과하다가 경비원에게 끌려 나오고,

겨우 만난 구매담당자는 명함도 안 주고,


수십 명의 병사를 지휘하던 장교였으며 20대 후반의 피 끓는 청춘이었던 내 앞에 들이닥치는 거절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자존심 상하는 상황들이었다.


신도리코 세일즈맨은

지역을 할당받고 지역 내 모든 사무실과 회사를 상대로 철저한 방문영업을 통해 시장조사와 고객니즈 탐색을 몸 하나로 해내야 하는 직판영업이었기에 모든 사무실의 문이 곧 잠재고객이었다. 신입 세일즈맨인 나는 회사에서 교육받은 대로 행동에 집중했다.


방문공포증을 없애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자의식과 자존심을 버려야 했다. 타인에 대하여 큰소리로 인사하고 방문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타인들로부터 마음 상하지 않고 세일즈 방문 목적의 달성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더욱더 '나'를 버리고 고객에게 집중하는 훈련이 필요했다.


나는 더 이상 개성이 있는 인생의 주인공인 내가 아니고, 오직 사무자동화의 효율적인 기기를 고객의 회사에 도입시켜 업무 생산성 향상을 제공하는 가치전달 메신저이자 협상자로 새로운 페로소를 나에게 씌워야 했다.


출근할 때마다 이렇게 외쳤다.


"나는 심장을 집에 두고 나왔다. 용왕님 앞에 잡혀간 토끼 같은 세일즈맨이다!"


하루에 20개의 회사를 방문하여 반드시 고객의 명함을 받아와야 했다. 명함과 함께 복사기와 팩시밀리 사용여부, 사용년수, 월 사용량, 기기의 노후정도, 기가에 대한 만족도, 차후 구매의향 등에 대한 정보 감지와 신도리코라는 회사에 대한 소개와 제품의 강점 어필 등을 하고 요약하여 업무일지에 작성해야 했다.


솔직히 타인의 사무실이나 회사 문을 여는 것은 창피하고 힘들었다. 특히 오전에 사전 악속도 없이 무작정 방문하는 것이 타인의 직장에 방해를 주는 행위 같았고

고객관계 형성이 제로인 상태에서 불쑥 찾아온 세일즈맨을 반기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신입 세일즈맨인 나는 다음과 같은 루틴을 만들었다.


가까운 화장실에 가서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거울을 보고 인사 연습을 한다.

'나'버리고 세일즈맨 마인드에 집중한다.


특히 규모가 작은 사무실에는 그 당시만 해도 각종 상품이나 보험을 판매하는 외판원 영업사원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불쑥불쑥 들어오는 낯선 이들의 방문거절을 위해 사무실 문에 '잡상인 출입금지'라고 써 붙인 곳이 종종 있었다.


이렇게 출입금지 메모가 붙은 사무실은 더욱더 힘차게 문을 열고 더 우렁차게 "안녕하십니까?"를 외쳤다.


나는 잡상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잡상인이 아닙니다. 사무자동화기기를 소개하러 신도리코에서 나왔습니다!"


첫 사무실의 문을 힘껏 열고 들어가서 기계적인 방문영업단계에 몸을 맡기고 정해 둔 시나리오대로 크게 인사하고,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 다가가 기기의 구매 관련업무 담당자를 찾고 담당자를 대면하면 다시 공손하게 인사와 동시에 명함을 내민다.


"실례가 되지 않으시면 명함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잠시만 앉아서 방문이유를 설명드려도 될까요?"


구매담당자의 공간을 점유하고 방문의 목적이 담당자의 업무효율과 담당자 회사의 업무생산성 향상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전달하는 것까지 길어야 3분 안에 다 끝내야 했다. 초기 방문에서는 최대한 시간을 단축하고 핵심정보와 담당자의 인적사항만 확인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부담을 더는 것이었다.


하루에 20건의 방문을 하려면 이동시간과 담당자 부재 시 대기시간, 취득한 정보를 명함 뒷 면이나 수첩에 적어두는 일까지 하려면 '순방문시간'을 짧게 그러나 집중적으로 압축해서 세일즈 프로세스를 돌려야 했다.


-담당자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과묵한 타입

-복사기 구입은 2년 전, 월 복사매수는 3천 매

-지사가 있으므로 추가 구매 가망성 차후 확인 필요


그렇게 신입 세일즈맨은 무작정 돌격 방문대장으로,

정보수집자로, 타인의 사무실 문에 대한 두려움을 친근함으로 바꾸어 가며 B2B 직판영업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방문영업의 시작에 첫 걸림돌은 나 자신이다.
세일즈 페르소나로 무장하고 잠재고객 앞에 서야 한다.
세일즈는 상품이나 서비스 가치를 중심으로 고객의 유익을 위하여 전달하는 과정이다.
세일즈 성과는 적절한 방문건수와 유효상담시간에 비례하여 나타난다.
세일즈 가치와 구매니즈가 맞을 때 거래가 성사된다. 최초 방문, 재방문, 니즈탐색을 통해서 협상을 통한 크로징 단계로 전개하는 것이 세일즈 프로세스다.
구매담당자도 사람이다. 진심은 통한다. 정기적인 방문으로 열정을 보여준다.


이런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세일즈에 대한 정의를 적어가며 신입사원 세일즈맨 1년 차를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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