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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vinstyle Jan 09. 2024

제 돈으로 드리겠습니다!

회사문화 답사기 4

첫 직장 신입 세일즈맨인 나는 월 매출목표를 어떻게든 달성하고 싶었다.


목표달성을 위해 평균적으로 매일 14개의 기업을 신규로 만나고 6개의 기업을 재방문 상담하는 것을 목표로 뛰었다.


순방문상담시간은 평균 5분, 20개*5분= 100분 이상을 만들고자 했다. 이동시간, 대기시간, 휴식시간, 점심시간을 빼면 하루에 20방문도 쉽지는 않았다.


구매 담당자를 못 만난 방문은 1일 20 방문 실적에서 제외시켰다. 나의 영업담당지역은 공단지역이라  바쁘게 이곳저곳으로 뛰다시피 다녀야 했다.


비가 오는 날은 우산에 가방에, 비 묻은 슈트를 털고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 화장실 거울을 자주 이용해야 해서 더 바쁘게 움직였다. 비 오는 날 영업에 유리한 점이 있었다. 구매 담당자들이 출장이나 자리를 비우지 않고 자리에 잘 있었던 점이다. 비가 오니 세일즈맨의 고객님들은 움직이는 게 귀찮은 거였다.


어느 늦여름 오전에 반송공단에 있는 작은 업체로부터 팩시밀리 상담 전화가 왔다. 고객상담부서에서 나용을 전달받고 판매의 기대감을 안고 얼른 버스를 타고 해당업체로 방문했다.


작은 이층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오래된 건물 이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오십 대 정도로 보이고 머리숱은 적고 작은 키에 살짝 배가 나오신 이미지의 고객은 영락없는 90년대 초반 '우리들의 보통 사장님' 이미지였다.


"안녕하십니까?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신도리코의 영업담당자입니다." 공손히 폴더 인사하고 명함을 건네드리고 사장님의 명함을 받았다.


사장님은 소파에 앉으라고 하셨고, 상석의 오른쪽에 가로로 앉았다. 통상적으로 상담을 할 경우 마주 보는 것보다는 측면에 앉는 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마음의 부담을 덜 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배웠으므로 현장에서 항상 앉을 때 적용하는 루틴이었다.


업체는 섬유기계의 설계를 해서 해외로 보내고, 오더를 받으면 기계공장에 주문해서 제작 후 다시 해외로 판매하는 수출업체였다. 하루에 두세 번 정도 해외 및 국내 제조사에 문서를 팩시밀리로 보내야 했는데 매 번 직원이나 사장님이 시내로 나가서 건별 외주 발송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마침 200만 원대 팩시밀리가 나왔다고 해서 이번 기회에 구입하려고 한다고 했다. 당시에는 신도리코, 제록스 두 개의 회사가 판매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후 대우전자, 삼성전자에서도 팩시밀리가 출시되었다.


방문하자마자 사장님의  구매니즈를 확인했으니 바로 판매계약으로 유도하고 계약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사장님께 신형 팩시밀리의 기능과 신도리코의 서비스에 대하여 5분 정도 설명드렸다. 사장님은 가격에 대해 물어보시곤 바로 가격인하를 요청하셨다.


팩시밀리 가격은 290만 원.


사장님 요청가격은 250만 원이었다.


"사장님. 제가 신입사원이어서 판매가격 인하결정권이 없으니 본사에 요청을 드린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바로 지점에 계신 과장님께 전화를 걸고 판매가 인하요청 건에 대해 보고 드렸다. 지침이 하달되었다.


신규제품이니 270만 원에 판매하라!!!


"사장님. 본사에서 특별히 20만 원을 인하할 수 있게 허락받았습니다. 이것은 사장님께 드리는 특별한 기회가 맞습니다. 지난주에도 인접 업체에 가격인하 없이 판매를 하였습니다. 270만 원에 계약하시죠?"


사장님은 현금을 줄 테니 250만 원이면 계약을 하고 내일 납품하고, 아니면 지금 사지 않겠다고 하셨다.


다시 한번 제고해 달라는 나의 청을 뒤로하고 사장님은 같은 말만 되풀이하셨다.


250만 원에 계약, 안되면 구매 안 함!


나는 판매계약을 꼭 성사시키고 싶었다.


1. 구매계획을 가진 확실한 가능고객이다.

2. 내가 물러나면 경쟁사 제품을 구입할 것이다.

3. 내 지역에 경쟁사 제품이 팔리게 할 수 없다.

4.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판매를 성공시켜야 한다.


나는 여전히 그 사무실의 낡은 소파 귀퉁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장님께 제고를 요청드리면서 물러나지 앉았다. 마침 사장님은 외부에서 오신 손님과 잠시 사무실 밖으로 나가시고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있었다. 삼십 분 뒤쯤 돌아오신 사장님은 여전히 내가 있음에 살짝 당황하신 것 같았다.


"안 가고 왜 아직 있능교? 고마 250만 원에 내일 기계 들고 오소. 아니면 말고"


사장님께 다시 한번 270만 원에 하시자고 제안드리고 소파에서 물러나지 않고 앉아있었다. 한 시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바쁘게 본인의 일을 하시던 사장님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내 앞에 와 앉으셨다.


"아따. 이 청년 참 질기네. 와 안 가고 있능교?"


나의 머릿속은 오직 어떻게 하면 사장님을 설득하여 판매를 성공시킬 수 있는가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꼭 판매하고 싶었다.


나는 비장의 카드를 쓰기로 했다.


"사장님. 저는 픽시밀리를 사장님께 꼭 판매하고 싶습니다. 사장님께서 250만 원을 원하시니 회사에서 허락한 270만 원에서 추가 인하 20만 원은 제 돈으로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250만 원을 맞추어 드리고 판매를 하겠습니다. 다만, 회사에서는 270만 원 이하로 판매를 못하게 하니 세금계산서는 270만 원에 끊게 해주십시요!"


이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20만 원이 담긴 봉투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날이 마침 월급날이어서 적금 넣을 20만 원을 봉투에 따로 가지고 있었던 참이었다.


사장님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머릿속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1. 까짓 거 한 달 월급 대신 판매성공하는 거다!

2. 아! 돈이 좀 아까운데, 정말 가져가실까?


위기의 순간에 인간은 담대하기도, 초라하기도 한 거다.


사장님은 웃으시며 돈 봉투를 내게 되밀어주셨다.


"고마 270만 원에 내일 팩시밀리 설치해 주소!"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얼른 돈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가방에서 쏜살같이 계약서를 꺼내 판매계약을 작성하고 크게 인사하고 신나게 그 업체를 빠져나왔다.


스물여섯 청년 세일즈맨이었던 나의 한 판 승부가 통한 것이 참 기뻤다. 돈봉투를 사장님께서 가져가셨어도 괞찮다고 여겼으나 돌려주신 것에 더 기뻤다.


돈을 돌려받은 것에 대한 기쁨보다 나의 판매의지를 좋게 보아주시고 구입을 결정해 주신 것이 보람 있었다. 그 늦여름 기름냄새 그득한 반송공단 골목길 안의 이 층집 오퍼업체와 인자하신 사장님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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