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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Feb 14. 2022

귄터 그라스, <양철북> - 유년의 상징

아이와 어른 사이

  많이 들어본 제목이나, 안 읽어본 소설. <양철북>이라는 제목에서 성장소설일 거라는 느낌은 받았는데, 저자분의 원고 편집하며 읽어보니 그 이상인 내용이었다.


  주인공 오스카는 어른들의 세계를 혐오하며 성장을 거부한다. 3살 생일날 층계에서 떨어져 스스로 성장을 멈춘다. 그가 울분을 토하면 두드리는 양철북은 그런 유년의 상징성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3살의 의지라니... 작품을 직접 읽어보지 않아서 개인적인 평도 가능하진 않지만, 그래도 설정이 조금 유치하지 않나?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이니, 내 감각을 반성해야 할 일이지만서도...


  나치 시대에 소년병이었던 저자의 경험이, 맹목적으로 파쇼를 따르던 독일 민족의 ‘유아성’을 상징하기도 한단다. 유아 시기의 상상계가 이끄는 판타지도 녹아 있는 듯. 신체의 성장은 3살에서 멈췄지만 어른에 필적하는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성욕은 순행으로 흘러간다. 사랑과 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몸만 어른이 된 아이 자아일 수 있겠다 싶기도...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어보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19금 버전으로 각색했다는 느낌 안 드나? <양철북>의 서머리 내용만 읽어 보면 <어린 왕자>의 성인용 버전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린 왕자도 다른 별에 두고 온 우리의 어린 시절의 상징이니까. <양철북> 같은 경우는 신체로 붙박아 둔 어린 왕자라고, 그러나 이미 정신은 어른이다 보니, 마냥 순수하지만은 않다. 때로 치기 어린 행위가 불러온 결과를 감당할 수 없어 도망치기도...


  어른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그런 역행의 가치들로 붙박아 둔 것들이 하나쯤은 있잖아. 내가 왜 그렇게 <슬램덩크>에 천착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자답은, 학교에서의 경험인 것 같다. 물론 대다수는 착한데... 사과가 조금만 썩어 있어도 그건 썩은 사과라고 하잖아. 비겁하고 유치한 학생들과, 졸렬하고 치사한 선생과 학부모에 관한, 일부의 썩은 기억들.


  정말 출근하기 싫었던 시기들도 있었어. 그 사람들을 대면하기 너무 싫은 거야. 정말 화병이 날 것 같더라구. 너도 나도 애들이기나 하면, 차라리 선빵이라도 날릴 텐데, 그럴 수는 없는 어른의 세계. 실상 이 바닥으로 건너와서도 가끔은 그래. 그래도 그 시절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게 일상이던 시절에는 다소 무감해지던 것들이, 그곳을 벗어나 다시 마주치니 조금은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그런 경우들이 없잖아. 그 시절, 어느 지나간 여름날, 그로부터 자라지 않고 싶은 마음. 그렇다고 내가 되게 순수한 건 아니야. 그 시기에 성욕은 가장 충만했으니까. 그 에로스로 폭발하면 경우 없는 이들에겐 끝장을 보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둥글어지는 건지. 실상 이제는 서서히 뭔가 지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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