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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Feb 25. 2022

사주팔자, 육해살(六害殺)

<오디세이아>, <맹자>, 니체

  잇대어지는 시련의 와중에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내일을 묻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간다. <오디세이아>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신화에서는 종종 이 죽음의 세계가 삶의 해법으로 제시되는 경우들이 있다. 거기엔 천기누설의 죄로 끌려온 예언자들이 있었다.


  이런 신화소(素)가 상징하는 바가 뭐겠어? <맹자>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人之有德慧術知者 恒存乎疢疾. 덕과 지혜와 삶의 기술과 지식을 지닌 자는 항상 고난 속에 있다고...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죽음의 충동은, 그 동안 안정성으로 믿고 있었던 가치체계를 무너뜨리며 다가오는 낯선 긴장감이다. 그 동안 견지해왔던 확신을 놓아버린 무력감으로 맞이한 태초의 혼돈 그 자체. 그 혼란의 와중에 흐릿해진 자의식의 경계 너머를 둘러보게 되는 것. 안정성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이 무너지고 있으니 미치겠지. 그러나 ‘죽음’의 시그널은 변화에 대한 욕망이기도 해. 뭔가 변하고 싶은데, 기존의 것도 놓아버리지 못하겠는 그 어정쩡한 부조리 안에서 돌아버리겠는 거지.


  현대사주학에서는 이런 저런 살들에 대해 과도한 해석을 자제한단다. 그런데 육해살 같은 경우는 아직도 비중 있게 다루는 편이래. 현대적으로 풀자면 예술인, 종교인, 혹은 철학자와 문인들에게서 발견되기도 하는 영적 소(素)야.


  가뜩이나 섬세하고 예민한 성향인데, 뭔가 뜻한 바대로 나아가지는 않고, 미쳐버릴 듯한 일들이 연거푸 밀려오는 상황인 거지. 일주가 신약한 경우엔, 여차하면 헛것 보는 거야. 몸이 아플 수도 있고, 우울증에 시달릴 수도 있고... 그런데 학생부에서 노상 버릇 없는 학생들과 경우 없는 학부모를 대하다 보면, 그들을 다루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거든. 이 상황도 마찬가지. 정말이지 죽겠는 상황에서, 그 죽음의 시그널이 숨겨두고 있는 승화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거. 예술이거나 신앙이거나 철학이거나 문학이거나...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새로운 천국을 세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세우기 위한 힘을 그 자신의 지옥 속에서 발견했다.”

  천국도 지옥의 질료로 만들어진다는 거. 천국은 장차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래해 있는 지옥으로부터 지어 올리는 것.


  카뮈의 <이방인> 관련 글 편집하다가 문득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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